향이 아름답다!
조심성이 없어 아끼는 와인잔을 깼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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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한화로 3만 원이 넘는
브랜드 와인잔을 샀다.
혹여나 깨질까 설거지를 할 때도 조심조심.
어느덧 일상이 되고 조심성을 잃었다.
그렇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잔을
순간의 실수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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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험을 통해 와인잔은
그냥 와인잔일뿐 내구성과 관련해
브랜드가 의미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세 번째부터는 1만 원 정도 하는 잔을 샀다.
더 저렴한 잔도 있었지만,
선회요동 후 향을 진하게 음미하기 위해
선호하는 잔의 형태는 포기할 수 없었다.
가격이 저렴해졌다 해서 조심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브랜드 잔을 처음 대할 때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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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가치가 옅어지고,
어김없이 조심성을 잃었다.
설거지를 하며 잔을 놓치거나
설거지 후 잔을 개수대에 세우다 넘어져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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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도
시간이 지나며 옅어진다.
그러다 조심성을 잃곤 한다.
그러면
깨진다.
소멸된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반복된다.
그런데 조심성을 잃어줘야
대상에 대한 친근감, 편안함, 동화됨 등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도 의미 있는 가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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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깬 잔은,
5번째 잔을 보내고 애도하는 아빠를 위해
딸아이가 선물한 잔이었다.
좀 더 특별한 가치가 담긴 녀석이었는데
조심성을 잃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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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벌 주기 위해
초겨울의 한기가 짙게 드리운 이 밤
구지비 나가 잔을 사 왔다.
오가는 길,
조심성을 잃지 않겠다는 여러 차례의 다짐을 반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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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레 잔에 붙은 스티커를 떼고
조심성 충만한 설거지를 거행하고
깨끗이 물기를 닦아 낸 후,
조심성과 그것의 상실 각각이 주는 장단을
생각하며 확신 없는 마음으로
조심성의 지속적 발현을 다짐한다.
그리고 일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