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이야기
밥 먹으라고 할 때 먹고, 자라고 하면 자고, 일어나라는 시간에 일어나서 텐트 접으면 관광지에 알아서 데려다준다. 돈 내고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여행이 왜 편하다고 하는지 몸으로 이해가 된다. 둘 다 해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서 플랜을 짜는 자유여행과 가이드와 함께하는 여행 중 뭘 더 좋아하는지 알아간다.
자유여행은 계획하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무작정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해당 지역에 대한 세세한 정보까지 알아봐야 한다.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지역이라면 상관없지만 아프리카같이 정보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면 몸은 힘들지만 여행은 더 재밌어(?) 진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하는 거라더니 누가 한 말인지 나에게 참 적절한 말이다.
이 사람이 나를 호구 잡고 있는지 아닌지는 결국 직접 경험으로 판단해야 한다. 여행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니 대화를 조금 나누다 보면 순수한 선의인지 뭔가를 바라는 사람인지도 어느 정도 구분이 되지만 편견을 갖고 세상을 대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허둥지둥 댈 때 누군가 선뜻 다가와 손을 내민다면 나는 그 손을 잡는 편이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택시 사기를 당하던 탓에 밤늦게 예약도 없이 도착한 내가 무작정 문을 두들겼을 때 위험하니 일단 들어오라고 했던 마다가스카르 안치라베에서의 숙소 사장님이 생각난다. 방 구조, 숙소 가격 등 간단한 정보만 전달해 주고 나가다 말고 다시 들어오셔서는 내일 아침을 먹을 거냐고 묻던 사람. 나는 정신이 없던 탓에 알겠다고 서둘러 대답을 마치고 짐을 정리한 뒤 잠에 들었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고 아침을 먹으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알겠다며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답하고는 30분가량을 더 누워 잤다. 그리고 아까보다 조금은 소심해진 문 두들기는 소리. 눈을 반쯤 뜬 채로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니 그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웃으면서 건네는 아침 인사와 함께.
게스트용 식당이 아닌 어느 방으로 따라오라는 것처럼 보이는 제스처에 들어간 곳에는 일반적인 호스텔에서 여럿이 먹는 조식이 아닌 차려진 가정집 밥이 있었다. 사장님은 예상치 못한 아침 식사에 당황하고 있는 나에게 식을까 걱정했다는 듯 따뜻한 음식을 주방에서 가져와 더 차려주셨다. 늦게 나온 나 때문에 미리 준비된 음식이 식었을까 다시 데워주셨던 거였다.
내 앞에 차려진 두 명 분의 음식,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그와 내 아침밥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분이었다. 마다가스카르에는 어떻게 온 건지,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등 궁금한 게 참 많았는데 나눈 대화의 절반은 이해를 못 한듯했다. 그는 변호사였다. 호스텔을 관리하는 아내는 다른 도시로 볼 일을 보러 가 현재는 운영을 안 하고 있었는데 밤늦게 문을 두들기던 내가 걱정돼서 받아준 거였다. 늦은 시간에는 현지인도 돌아다니지 않는다며, 되도록이면 오늘도 해가 지기 전엔 들어오라 말한다.
다음 날 일찍 출발해야 하는 탓에 그날 저녁에 미리 숙박비를 계산하는데 아침 식사 비용은 받지 않겠다며 그러지 말고 내일도 아침을 먹고 가라고 한다. 나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너무 고마웠다는 말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떠나는 내 발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방에서 나오는 그가 보인다. 자기 번호를 적어가라며, 다음에 오게 되면 그때는 시간을 내서 도시 구경을 시켜줄 테니 꼭 다시 들려달라고.
택시 사기를 당해 하루를 통째로 망친 날, 대가 없는 선한 호의를 받는다면 그날은 무슨 날로 기억될까. 미운 사람보다는 고마운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사람에게 데인 상처는 사람으로 치료된다. 사람을 미워하는 탓에 다가가길 두려워한다면 더 이상의 상처는 생기지 않겠지만 이미 생긴 상처 또한 아물지 않는다. 한 번의 속상한 일로 여행을 전부 기록하기엔 다음에 다가올 일이 기대되고, 그렇다고 이어가자니 경험이 쌓였는지 의심병이 생긴다.
그렇기에 여행이라 말한다. 살면서 쌓아둔 편견은 전부 다 잊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동안 살던 방식과 전혀 다르게 세상을 대하며 나조차도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오롯이 순간을 즐기는 것. 혼자라는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는 것. 여럿이 아닌 혼자 하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 떠나기 전엔 절대로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