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산업화와 전쟁

다섯번째 강의

15세기 유럽

15세기 유럽은 재건과 부활의 시기였다. 역사상 가장 처참한 피해를 낳은 흑사병이 지나간 이후, 1350년부터 점차적으로 인구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아직 회복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많은 것들이 다소 불안정한 시기였다. 시장이나 경제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가 없었으며, 문화와 기술 면에 있어 중국과 동방의 이슬람 국가들보다 확연히 뒤쳐져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는 자본주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최초의 은행이 설립되며, 배당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운영되는 민간 주식회사가 곧이어 등장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투자의 개념이 설립되고, 개념으로 시작한 투자는 곧바로 대규모의 경제적 움직임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초기 형태의 투자가 주로 이루어졌던 부문이 바로 군 관련 기업인데, 군용 관리 자원이나 무기, 물자 제조업에 거의 모든 투자가 이루어졌다. 흔히 말하는 “무력 자산”은 결국 국가의 권력과 질서 유지에 직결되었고, 혼란한 대륙의 정세에 맞추어 매우 빠르게 발전하게 된다. 이때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해 활판 인쇄술 또한 발명/완성되었다. 세기 말인 1492년,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간의 교류가 성사되며 비로소 서구권의 네크워크가 자리잡히게 된다.


제국주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서부 열강(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정복자들과 상인은 앞다투어 신대륙으로 향하게 된다. 선박과 나침반과 같은 항해 기술의 발전으로, 유럽인들은 전보다 더 먼 곳을 탐험하고 침략하게 된다. 당시의 유럽 정복자들(Conquistadors)이 미국 대륙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무차별적인 점령과 학살로 땅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그들이 유럽에서 옮겨온 질병과 세균은 당시 원주민의 약 90-95% 가량을 사망하게 한 주요 원인이 된다. 질병과 함께 더불어, 신대륙에 뿌리를 내린 또 다른 것이 바로 유럽의 종교이다. 대부분이 천주교였던 유럽 국가들은, 정복의 폐해와 함께 그들의 종교 또한 신대륙에 깊게 뿌리내리게 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치치 않은 정복전쟁은 곧이어 아프리카로 내려오게 된다. 아프리카 또한 장악하는데 성공한 열강들은 곧이어 노예제도를 확립하고 아프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그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이로 인하여 아프리카를 통한 대서양 노예무역이 막을 열게 된다. 매우 굳건하고 무자비하게 잡힌 이러한 무역 시스템은 군인/전사들과 상인들에 의하여 중개되고,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행동의 지속과 함께, 유럽의 인종주의 사상이 등장하게 된다. 인종주의 핵심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한다는 것에 있다. 아프리카 흑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며, 백인들과의 차별점을 바탕으로 분리/차별을 변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 뿐만 아니라, 미국 대륙에서도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노예제는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어떤 형식으로든 발현되고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국가의 사상이나 과학이 전무하던 초기 인류의 사회에서부터 존재해왔던 것이기도 하기에, 기술과 사상의 발전은 오히려 그러한 불평등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인류 역사의 초기보다 더욱 강력하고 진하게 발현된 이러한 불평등으로 인하여, 각 대륙의 상인들과 노예무역의 관계자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따라, 유럽과 아메리카 내부에서의 권력도 차츰 변화해가기 시작한다. 혈연에 의해 신분과 재산, 즉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던 과거와 달리, 무역 및 산업으로 인하여 중산층이 빠르게 증가하게 된다. 중산층, 혹은 부르주아 계층이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그들의 영향력도 증가하게 되는데,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부르주아들이 대부분 군 관련 기업과 투자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귀족들은 갈수록 그 힘을 잃어갔고, 전쟁에서 귀족의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하며 그들이 가진 명예마저 차츰 빛바래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이러한 흔들리는 권력에 매우 큰 타격을 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존 로크(John Locke)와 그가 제시한 “피치자의 동의(Consent of the Governed)”라는 개념이다. 고대 로마의 초기 민주주의 사상에서 기원한 그의 이론은, 통치자의 권력과 지위는 국민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반권위주의적 사상을 더욱더 기존의 사회의 틀을 흔들었고, 굳건하던 사회의 권력 질서는 더욱 위태로운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아메리카 대륙 탐험으로부터 약 250년 뒤인 1776년, 미국이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앞세워 영국에 대한 반란을 성공, 곧이어 유럽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식민국가 곳곳에서 많은 혁명 및 독립 투쟁이 일어났는데, 대부분 시도에 그치거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프리카에서 그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가 나오기도 했는데, 바로 1791년의 아이티 혁명이었다.


민족주의

18-19세기에 들어오며, 새로운 정치적 사상인 민족주의가 유럽 곳곳에서 부상하게 된다. 사상의 근간이 되는 “언어, 역사, 문화가 같은 사람들끼리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라는 생각은 유럽 사회가 뿌리깊은 군주제에서 비로소 벗어남을 알리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상상된 공동체 형성을 통하여 사람들은 스스로를 왕이나 신의 “신하”가 아닌 개개인의 “국민”으로 인지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민족국가의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마다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인간의 공통점을 핵심으로 둔 민족주의는 약화된 왕권과 귀족의 힘, 또한 성공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몇몇 국가들을 기점으로 삼아 빠르게 퍼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무능한 귀족이나 엘리트들은 끌어내리고, 같은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찾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인근의 민족국가의 유무에 따라 속도와 방향성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새로 탄생한 민족국가들은 인근의 민족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인근의 민족국가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 인하여 민족국가의 탄생이 더욱 가속화되거나 민족국가의 설립 확률이 크게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전반적이 사회/문화적 혁명의 상태로 돌입하게 되며, 민족국가만의 정체성과 힘은 더욱더 강력해져갔다. 이러한 정체성과 사상은 교육과 군복룰 통하여 더욱 확산하게 되었고, 이는 직접적으로 국가의 국민간의 연대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결국 국가적 차원에서 똘똘 뭉치게 된 민족국가의 힘은 더욱 강력해졌고, 비민족주의 국가들은 자연스래 경쟁에서 낙오; 곧이어 유럽 대부분은 민족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유럽은 16세기부터 빠르게 발전해오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교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1500년경, 유럽에는 벌써 약 50개정도의 대학이 설립되어 있는 상태이다.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 불리던 통신 네트워크는 세계의 지식인들이 편지를 통하여 생각과 지식을 교류하고, 결과적으로 산업혁명과 같이 성장한 교육과 현대지식에 매우 큰 초석이 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영국은 유독 더욱 산업화에 있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국이 산업혁명의 핵심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다. 영국의 지리적 특성상 풍부한 철과 석탄으로 연료 사용과 유지가 상당히 수월했고, 증기 기관이나 석탄을 원료로 하는 엔진 등 여러가지 산업 개발도 가속화되었다. 완전한 자본주의의 형태를 띈 경제 또한 큰 부분을 차지하였는데, 런던 증권거래소의 설립 및 활성화와, 기업에게 매우 친화적인 나라의 법률 덕분에 기업이나 개인간의 지식 교류나 산업 협력이 더욱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화의 과정에 있어, 관료제의 활성화 또한 빠질 수 없는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현대적 관료 조직이 등장하게 되며, 연줄과 후원으로 이루어지던 정치 체제가 무너지고 변화하기 시작한다. 왕권이나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족벌주의 중심의 정부에서, 관료주의의 확산으로 인하여 정부 기관과 사회의 전반적인 양상이 조금씩 능력주의의 양상의 띄게 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로 눈에 띄게 많은 파급효과 또한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다. 산업의 확장으로 인하여 육상/해상 교통과 운반에 있어 매우 빠르고 연속적인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전보/전신과 모스부호 같은 새로운 통신 매게체나 소통 네트워크도 눈에 띄게 발전하고 다양하게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빠른 소통과 더욱 긴밀화된 국제 네트워크로 인하여 부정적이거나 우려할만한 효과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국제적 위기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전 세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촘촘하게 연결된 만큼, 한 나라나 지역에서의 문제는 더이상 그곳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경제 위기나 전염병의 경우, 그 타격이 다른 나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동시에 도심 개발의 가속화도 이루어지게 되며, 이주/이민율도 눈에 띄게 증가하게 되었고, 노동이라는 개념 또한 완전한 상업화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산업화의 가속에 따라 전반적인 사회적 불평등도 증가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급격하게 이루어진 산업화이지만, 그 이익과 대가를 제대로 이해한 것은 극소수의 산업가들 뿐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산업의 주주들과 산업의 핵심이 되는 정부나 기업의 중간의 위치한 브로커와 비슷한 위치를 지닌 자들이었는데, 아이러니하지만 당연하게도, 오직 이들만이 산업화와 경제화에서 나오는 생산자의 잉여와, 재산의 불공정한 배분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머지는 이에 관하여 크게 무지한 편이었고, 결과적으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은 갈수록 더욱 증가하게 된다. 너무 빠른 산업화의 속도와 정부의 무지함 탓인지, 이러한 불평등을 중화해줄 법안이나 정책은 늘 피해에 비해 한발 늦었다. 현시대의 AI기술과 비슷하게,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발전에 비해, 안전망을 제공해줄 기관이나 정책이 없었던 것이다.



노동과 노예제도

노동과 노예제도의 관련된 문제도 점차 극명해지며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빈곤화(Verelendung)이라는 개념이 제시되며, 갈수록 악화되는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 또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미 견디거나 참고 넘어갈 수준의 불평등은 지나친지 오래였기에, 곳곳에서 처우 개선을 위한 생각들과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조합이나 시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자본주의에 직접적으로 반하는 사상인 사회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초기 인류의 협력 단계와 비슷하게, 연대감과 공통된 목표를 가진 이들이 뭉쳐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반발은 보다 강한 무력으로 제압되거나, 뜻을 다하지 못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조를 직접적으로 바꾸게 된 사례들도 몇몇 있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아동노동의 폐지나 근로기준법과 같은 정책의 탄생이다. 더 나아가 결과적으로 노예제도의 폐지도 이루어지긴 했으나, 피해보상이 노예들이 아니라 그 주인이었던 개인에게 돌아갔다는 점 또한 주목할만한 사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노예제도의 폐지로 발생한 잉여 노동 자원의 대부분은 성매매나 제조업의 단순노동, 즉 다른 형태의 착취로 재배치되게 된다.

노예제도와 식민지화에 대해 얘기할때, 제일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이다. 188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아프리카 쟁탈전”은 베를린 회의에서 임의로 나눠진 국경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에 가담하게 되며, 국가 간 충돌을 방지하고자 말 그대로 “자를 대고 줄을 그어” 대륙에 멋대로 국경선을 만드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멋대로 나눠가진 땅을 침략한 유럽은 대륙적인 착취를 시작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어난 이러한 침략은 1800년도 중반인 노예제도 폐지 직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식민지화라는 명목 하에 노동력과 자원 착취는 지속되었으며, 인종차별 또한 더욱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입장에서는 “개발”과 “선진화”였으나, 아프리카의 입장에선 그저 침략과 문화적 학살에 불과할 뿐이었다. 유럽을 보다 효율적이게 운용되는 현대적인 관료체제와 막강하게 성장한 군대와 산업을 앞에서 더욱 식민지를 넓혀갔다. 국가의 역할은 영토를 넓히는것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렇게 넓힌 영토 내에서의 식민교육은 대부분 선교사가 담당하는 형태였다. 막강한 타격을 입힌 아프리카와 달리, 동부 유럽에는 아직까지 유목생활을 하는 민족들이 남아있게 되었는데, 현대로 넘어오며 흔히 집시라 불리게 되는 로마니(Romani)나 사미(Sami)민족이 그 예이다.


1차 세계대전

1900년도에 진입하게 되며,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한다. 당시 “대전쟁(The Great War)”라고도 불린 1차대전은 당시 오스트리아 황국의 프란츠 퍼디난드 대공의 암살로 인해 시작된다. 비록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시기였기도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과 문학가들에게 영감과 사상을 제공하였기에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영향력이 큰 전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라간의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지면서, 사회적 시스템 또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제일 대표적인 변화가 바로 선거권의 확대이다. 이미 사회는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었고, 교육받고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깨우친 사람들이 늘어나며, 국가와 권력은 이전처럼 절대적이고 전능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더이상 이유 없이 전쟁에 참여하여 목숨을 내놓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더불어, 기존에 집권하던 엘리트/귀족 계층 또한 국가의 경쟁력을 위해 점진적으로 민주주의 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발전과 무관하게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사회 분위기와 같이 여러 나라들의 중심적인 정치 사상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불이 붙은 1차대전에 기름의 역할이자, 2차대전의 방아쇠라고도 할 수 있는 정치 사상인 파시즘이 등장한 것이다. 민족/종교의 순수성의 신화와도 같은 이데아와, 사상/정치적으로 반대되거나 본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구에게나 서스럼없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의 만남으로 탄생한 사상이 파시즘인 것이다. 아직까지 나라를 휘어잡던 기존의 엘리트들을 몰아내는 순수한 형태의 국가를 홍보하며 시작된 파시즘은 노동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 크게 불안정함을 느끼는 일반 서민 남성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정치 사상으로 각인되게 된다. 이때 사용된 방법이 바로 음모론인데, 독일에서 나온 유명한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흑사병의 원인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어서이다”라는 반유대주의의 사상이다. 이러한 악하게 짜여진 이론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이 세상을 지배하고자 한다는 음모론을 전파하며, 독일과 유럽 곳곳에 반유대주의 사상을 형성시키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종전 이후에도 꾸준히 남아있게 되고, 결국 이 위험한 사상을 히틀러라는 자가 물려받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러한 사상의 기반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악행은 결국 “독일의 문제를 해결하자”라는 명목 하에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민족 학살을 초래하게 된다. 홀로코스트라도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을 진화인류학적 시각으로 봤을때, 4가지 요소의 융합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1.강제 수용소(독일군의 나미비아 점령 당시 실험을 해본 방법이었다), 2.신경가스의 사용(2차대전 직전, 효과성을 입증하고자 장애인들에게 실험용으로 사용한 전적이 있다), 3.관료주의적 조직, 4.사회적 다윈주의 사상 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여파로 인하여, 탈식민화도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세계대전과 동시적으로 전 세계에서 독립하게 되는 국가들이 증가하였으며, 일부는 전쟁을 통해 자유를 되돌려받고, 일부는 협상을 통해 진행되었다


정리

근대 역사에서 유럽을 빼놓는다면 매우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다. 분명 위대한 발병품들이나 사상, 사회구조도 없어질 것이고, 기술과 산업의 발전 상태도 몇백년은 뒤쳐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어두웠던 역사의 순간들 또한 같이 사라질 것이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앞서있다는 이유로 품은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오만한 열망 아래 희생된 개인과 국가와 민족은 결코 잊혀지거나 넘겨짚어져선 안될 것들이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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