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대학원을 포기했는가
2025년 1월 3일, 일본 아사히카와.
온 세상은 하얀 눈꽃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나는 여행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학원을 등록할지 말지 고민에 빠져있다.
일력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열어본 '대학원 신입생 모집' 공문. 예전부터 무언가를 깊이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확실히 정하지 못해 대학원을 계속 미뤄왔다. 그러다 만난 것이 '수어', 수어라면 깊이 배워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게 됐다. 대학원 면접은 이미 합격. 당돌하게도, 교수님께 "붙으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하고 물었다.
하지만 ‘대학원 신입생 모집’ 공문을 본 날부터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정말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일력 제작으로 정신없던 그 시기, '이건 나에게 온 기회가 아닐까'하는 생각뿐이었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간을 충분히 갖고 물어봤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계속 묻고 있었다.
"저 대학원 고민 중인데 대학원 추천하시나요?"
박사과정을 밟은 선생님에게, 가족에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조언을 구하던 분에게 물었다. 답은 제각기 달랐다. 어떤 사람은 추천했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좁은 길이라며 말리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건 조언을 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내 삶을 대신 결정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누구에게 물어보는지에 따라 그 결정은 산으로 가기도 한다. 조언을 구할 땐, 조언자가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그 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마주하게 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가 없다.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림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에게 가서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하고 묻는다면 어떤 답이 돌아올까?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조언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며, 걱정한다는 이유로 결국엔 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끝나기 십상이다. 대게는 이런 말을 듣게 되면 휘둘리기 쉽고, 내가 정말 바라는 건지 의심하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조언이 필요하다면 그 길을 걸어본 사람에게 물어야 하고, 그 외에는 물어볼 필요가 없다. 꼭 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물었다.
“너 정말로 대학원 가고 싶어?”
지금까지 무언가를 배우면 늘 시험으로 끝을 맺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왜 이걸 시작했는지 잊어버렸고, 시험이 끝나는 동시에 흥미를 잃어 더 이상 그걸 배우지 않게 되었다.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어에 대한 흥미를 잃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어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대학원은 수어를 깊이 '연구'를 하는 곳이지 '표현'하기 위해 가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수어를 통해서 무언가 '표현'하고 '창작'하고 싶었던 것이지, 연구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의 결정은, '가지 않겠다'이다.
<나에게 조언 해준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
샘, 저 대학원 합격했는데 포기했어요..!
샘이 오랜 시간 상담해 주시고 대학원에 가길 바랐는데 이런 결정을 내려서 미리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왜’를 따라가다 보니 이런 결론이 났어요.
제가 수어를 배우는 목적이 그냥 재미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잘하고 싶다는 것 외에는 크게 없어요. 수어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이전에 그저 ‘재미’로 하는 것인데 대학원에 가야 하는 명확한 이유 없이 가게 되면 재미가 꺾일 것 같았어요. 사실 대학원을 가봐야 재미가 더해질지 반감될지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그만큼 돈과 시간을 쏟게 되면 무언가 아웃풋을 바라게 될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재미를 잃고 싶지 않았고, 수어를 대학원이 아닌 곳에서도 배울 수 있기에 다른 길을 가보기로 했어요.
작가와의 만남에서 사람들에게 수어를 알려줬는데 가르쳐 주는 것도 참 재미있더라고요. 다만 좀 더 잘 가르치고 싶어서 수어교원양성 과정을 밟고 있어요. 사실 특수교사라서 교원자격증은 필요 없지만, 특수교사라서 수어를 잘 알고 가르치는 건 아니기에 열심히 배우는 중이에요. 지금 제 앞에 놓인 수어교원과 수어통역사 과정을 밟으면서 제가 수어라는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해보려고 해요. 뭔가 변명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샘이 저에게 쏟아준 시간에 대한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
저는 아름다운 곳에 놓일 때 가장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그중에서도 자연이라는 아름다움에 가장 큰 행복감을 느껴요. 그래서 무언가 꼭 크게 이뤄야 하나 싶은 생각도 종종 듭니다.
샘이 창작은 일상을 지탱하는 힘이라 하셨던 것처럼 저도 제가 만난 아름다움을 창작하며 살고 싶어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수어를 ‘연구’하고 싶은 게 아니라 수어를 통해서도 ‘창작’을 하고 싶어요. 그 길이 험하더라도, 샘처럼 창작하는 삶을 살아보려 해요. 이 선택이 옳은 방향일 수 있도록, 저의 삶을 재미있게 살아보겠습니다 :)
무엇을 결정하든, 내 인생을 책임지는 건 나다. 그러니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지 말자. 조언이 꼭 필요하다면, 그 길을 걸어가 본 사람에게만 구하도록.
다만, 혼자서 '왜'를 너무 오래 고민하다 보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왜'라는 답은 도전하는 과정에서 찾아지기도 하니, 답을 찾는 과정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시험이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남기며 살고 싶다.
누군가에게 허락받듯이 조언을 구하는 일은, 이제 그만.
허락은 나에게 받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