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누군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좋아서 365 수어 일력> 작가와의 만남을 하고 와서

by 귀로미

"잘난 거랑 잘 사는 거랑 다른 게 뭔지 알아?

못난 놈이라도 잘난 것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나 여기 살아있다. 나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러는 게 진짜 잘 사는 거야.


잘난 건 타고나는 거지만

잘 사는 거는 네 할 나름이라고"


__드라마 <눈이 부시게> 中


이 대사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문장이다. 삶은 딱 한 번뿐이기에 잘살고 싶은데, 도대체 '잘 산다'는 게 뭔지 몰라 늘 헤맸다. 그러다 삶을 다루는 책이나 드라마를 만날 때면 '맞아. 이렇게 사는 거지' 하며 작은 힌트를 얻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만 증명하려고 애쓰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왜 이토록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걸까. 도대체 뭘 증명하고 싶은 걸까.


2024년의 끝자락, '문화예술창작소 그리다'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의뢰받았다. <내가 좋아서 365 수어 일력>을 알리다가 우연히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귀한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일력을 만든 이유를 말하려면 결국 나의 삶부터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내가 태어난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세상엔 이미 언니라는 경쟁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4년 뒤 더 강력한 경쟁자, 남동생이 태어났죠. 언니는 첫째여서, 남동생은 남자여서 관심받았지만 저는 둘째여서인지 관심을 받지 못했어요. 명절엔 세뱃돈도 동생보다 적게 받았고, 차별받을 때마다 나를 의심하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돌아보게 됐죠. 사랑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랑받기 위해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되기로 했어요. 하지만 말을 잘 듣는 아이는 관심을 더 받지 못하게 돼요. 알아서 잘한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렇게 저는 30년 넘는 세월 동안, 사랑받기 위해 제가 원하는 선택이 아닌 남들이 원하는 선택을 하며 살았어요. 그럼 사랑받을 줄 알았던 거죠. 짜장, 짬뽕 앞에서도 늘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며 상대가 원하는 선택을 할 정도로 말이죠."


이야기를 하던 중, 한 분이 눈물을 흘렸다. 어릴 적 내 모습이 안타까워서였을까, 아님 본인의 유년시설이 겹쳐 보여서였을까.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그 눈물에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고생했어, 괜찮아' 하며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결혼 후,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남편은 참 근자감이 넘치는 사람인데, 남편을 볼 때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저렇게 자신을 사랑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러다 문득, '존재 자체만으로도 근거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쯤은 저도, 그렇게 채워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그림일기예요. 나를 채워주기 위해 썼던 나를 아껴주는 그림과 글이 <내가 좋아서 365 수어 일력>으로 나오게 됐고, 수어로 인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져 작가와의 만남까지 이어지게 됐어요."


<내가 좋아서 365 수어 일력>의 탄생에 이어 수어 이야기를 나눴다. 수어를 처음 배우던 날 수어가 사람을 존중하게 만드는 언어라는 생각이 들어 수어를 1년간 계속 배웠다는 이야기, 농인 할아버지의 일화를 통해 수어를 아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하루를 기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 뉴질랜드처럼 우리나라에도 생활 전반에서 수어를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했다. 부끄럽지만 나의 수어시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영상도 보여드렸다. 소리 없이 수어만 나오는 영상, 사람들은 영상을 보고 하나 둘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보이는 것, 그것만큼 위로되는 게 있을까.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했으면 하는 예쁜 수어 6가지도 알려드렸다. '괜찮아, 사랑해, 100점, 좋아해, 아름다워, 할 수 있어'. 수어를 처음 배우는 분들이어서 서툴렀지만, 서로에게 수어로 말하며 마음을 전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몇 주 뒤, "수어 배우고 싶었어요." 하셨던 분들이 정말로 수어 수업을 등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 행동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누군가를 가르칠 수는 있지만, 행동하게 만드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100명을 가르쳐도 실천하는 건 1-2명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내가 알게 된 삶의 지혜를 누군가가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삶은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작고 연약해서,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는, 정말로 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가 꼭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그만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하려고 애쓰지 말고, 내 이야기가 필요한 곳에 계속해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이런 나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 당신도 당신으로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이다.


우린 모두 작고 연약하지만

우리 안엔 크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나는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으면 한다.


수어든, 노래든, 그림이든, 사진, 글, 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당신이 당신을 세상에 내보였으면 한다.


11.25.jpg







keyword
이전 18화당신은 어떻게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