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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18. 2021

농업혁명, 역사의 궤도를 바꾸다

인간의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바꾼 운명의 장난

  인지혁명의 기적으로 인류는 독자적 역사의 포문을 열었지만, 아직은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호랑이를 퇴치하고 매머드를 쓰러뜨리는 방법을 알아냈으나, 여전히 인간은 개인으로선 취약한 존재였고 식량을 한꺼번에 많이 획득해도 오랫동안 보관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아까운 식량이 부패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렵-채집 특성상 식량 공급의 안정성도 떨어졌기에,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종교는 사람들을 단합시킬 수는 있었지만 없는 식량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태로운 일상은 우연한 계기로 180도 변화했다. 농업을 시작한 이후 인류는 기나긴 유랑 생활을 접고 한 곳에 정착해 무리를 이루어 마을, 도시를 성장시켰다. 도시는 이내 엄격한 사회 질서를 갖춘 도시 국가로 도약하며, 기나긴 선사시대의 막을 내렸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지혁명은 인류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오르는 서사를 몇십만 년에 걸쳐 완성시켰지만, 농업혁명은 단 몇천 년 만에 도시혁명을 파생시키고 인류 결집의 최대 단위인 국가를 만들어 냈다. 한 번 가속된 회전은 결코 그 스피드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인류사는 거침없이 뻗어나가며 상업혁명과 산업혁명을 발생시켰고, 혁명 사이의 기간도 점점 짧아졌다.


  우리는 역사를 압축적으로 성장시킨 농사에 대해 좀 더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도대체 농경이 어떻게 이토록 파괴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과거에나 지금이나, 작은 차이를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통찰력은 혁신의 원천이다.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살던 사람들은 늘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을 찾아 헤맸다. 오랫동안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던 중, 호기심과 관찰력이 풍부한 누군가가 탈립성이 떨어지는 돌연변이 밀을 발견했다. 이전부터 성숙한 밀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타이밍을 번번이 놓쳐 씨앗을 먹지 못했던 그는, 우연히 포착한 횡재를 놓치지 않았다. 입 속으로 들어간 것을 제외한 밀알은 공동체의 영역에 심어져 역사적인 첫 수확물이 되었다.


  초식동물을 사냥하고 버섯과 과일을 채집하던 사람들에게, 식량의 원천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농사는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작물은 식량을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얼룩말이나 양은 먹이를 찾아 계속 이동하며 타깃으로 설정해도 재빠르게 도망치기 때문에 사냥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지만, 벼와 밀은 제대로 키우기만 하면 가만히 있는 알곡을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알곡 속 당분은 인류가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단맛을 제공해 준다.


  물론 농업이란 선택지를 두고 당대 사람들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기후와 토양 조건에 작황이 좌우되므로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았고, 병충해라는 변수도 존재했다. 뿌린 대로 거둘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파종과 영양분 공급, 수확을 비롯한 일련의 과정이 요구하는 노동 강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벼와 밀을 키우는 데에 시간을 투입하면 수렵과 채집을 상당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작물은 탄수화물 이외의 영양소가 부족한 불균형 식품이므로 농사에 의존하면 건강도 담보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난감한 딜레마에 마주하여, 인류가 거대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농경을 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물학적으로 어떤 종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결정하는 가장 간단명료한 지표는 개체 수이다. 삶의 방식과 상관없이 더 많은 수가 생존할 수 있다면, 생물은 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에 묶여 있는 인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농사는 비가 지나치게 적게 오면 실패하며, 반대로 너무 와도 실패한다. 해충이 몰려오면 반년 동안 생고생을 해서 겨우 진행한 한 해 농사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수렵과 채집에 투자할 시간을 농사에 투입하는 것은 기댓값이 그렇게 크지 않으면서 리스크가 지나치게 큰 도박이다. 후자를 선택할 만한 동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커스를 집단으로 옮기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농사는 선별적인 식물 종을 좁은 면적에 집약적으로 키우는 것이므로, 일단 성공하면 원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먹여 살리고도 거뜬한 양을 수확할 수 있었다. 구성원의 수를 최대화하여 그룹의 파워를 극대화하는 것이 집단의 최우선 목표였기에, 집단 단위로 보았을 때는 농업이 해볼 만한 내기였다. 많은 수확은 수렵-채집에 의존하는 집단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인구를 부양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믿음을 가진 공동체가 잠재적 경쟁 그룹을 물리칠 최고의 카드가 수적 확대인 만큼, 리스크를 감당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리스크보다 기댓값에 희망을 걸었고, 고된 노동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이전보다 더 많은 열량을 취하는 것을 선택했다. 농경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농업이 시작된 이후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고, 이는 문명 발전을 이끈 도시혁명으로 직결되었다. 인류의 판단은 다시 한번 적중했고, 당대 사람들의 선택은 후대에 '농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운명을 건 도박이 성공했지만,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수렵과 채집에 대한 경험은 많았지만, 농작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아무런 밑바탕도 없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노동력을 투입해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농사 매뉴얼을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다행히 9천 년 전의 메소포타미아인은 물줄기를 바꿀 수 있을 만큼의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커다란 돌덩이를 옮겨 신전을 만들던 근성과 단합력으로 그들은 끝내 과업을 완수했다. 그리고 주식을 얻는 방법을 변경함에 따라, 사람들은 지속적인 노동이라는 새로운 루틴에 적응해야 했다. 대형 초식동물을 하나 잡으면 며칠은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지만, 밀은 인근의 초식동물에 노출되어 있 매일 돌봐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라 왔던 정착 생활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은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농사를 지을 만한 여건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매해 밀 농사를 짓는 고역을 치렀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확실했다. 밀은 빠르게 커져가는 집단을 지탱해 주었고,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사회적 분업 개념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는 것에 특화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농사에 전념하며, 종교적 리더는 가끔씩 남는 농작물과 가축화한 동물들로 의례를 치렀다.


  사회 전체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하는 일이 다양해지면서, 각자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교환이 절실해졌다. 교환을 비롯한 상호 교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람들은 뭉치기 시작했고, 이는 도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농업혁명과 도시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도시의 분업은 각 분야에서 전문성의 강화를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교류에 의한 아이디어의 창발적인 생산도 가능하게 했다. 뗀석기가 간석기가 되기까지는 몇십만 년이 소요되었지만, 간석기가 청동기가 될 때까지는 몇천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농업사회로 진입하면서 다양한 용도에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해줄 도구가 필요해졌고, 전보다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는 공동체는 분업의 효과로 목표를 빠르게 성취해 갔다.


도시는 창의적인 개발자들의 교류의 장이 되어 주며
끊임없이 혁신이 끓어오르는 용광로가 되었다

  도시는 이전 공동체보다 인구가 조밀하게 모여 있기 때문에, 상호 교류의 빈도가 높고 형태도 다양했다. 자연의 정해진 리듬에 맞추어 수동적으로 일해야 하는 농촌과 달리, 도시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 여건에 맞추어 주도적으로 수요를 충족시키며 살아가야 했다. 주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보고 배울 기회도 풍부했으며, 타인의 성취를 보고 자극을 받아 경쟁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환경이 조성되었다.


  비록 농촌보다 등장은 늦었지만, 도시는 문명의 발달에 본인이 적임자임을 증명했다. 농촌보다 역동적이고 확장성이 강한 도시의 존재는 이윽고 도시 국가라는 발전형으로 직결되었다. 구축한 사회는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풍요로워졌다. 이후의 역사에서 주무대는 도시의 몫이었다.


  그러나 농업혁명과 도시혁명의 찬란한 성과에는 두 얼굴이 깃들어 있었다. 사회의 생산량이 구성원의 식량 필요량을 초과한 시점부터, 그 양면은 자신만의 역사를 써내려 갈 힘을 얻게 되었다. 경제가 인류사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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