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루 Oct 06. 2021

인간의 세상 인식, 그 장대한 변천사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전 글에서, 인류가 허약한 몸을 가지고 수백만 년간 거친 서바이벌을 겪은 끝에 살아남은 가장 큰 원인이 소통 능력의 정교화라고 밝힌 바가 있다. 획기적인 발견이나 발명으로 도구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는 데에 걸리는 긴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것은, 효율적인 의사소통 방식인 언어와 집단의 크기를 확장해 주는 원시 신앙의 힘이었을 것이다.


  분명 고대 사회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은 자연에 뚜렷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을 내며 섬광을 대지에 내리꽂는 천둥과 번개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안겨주는 대상이었고, 갓 초보 농사꾼이 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변수인 기후의 통제권을 가진 자연은 늘 기도를 드려야 하는 초월적 존재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턴가 인간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해, 지금은 자연의 신비를 낱낱이 파헤치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땅이나 바다에서 꺼내가고 있다.


  자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무척 당혹스러운 변화임에 틀림없다. 2000년 전까지만 해도 제사를 지내며 대지를 섬기던 한낱 생물 종이, 언제부턴가 스스로가 존귀한 존재임을 합리화하고 자신들이 망쳐 놓은 환경을 어떻게 회복시킬지 고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다 충실한 인간이 불경스러울 정도로 대담해진 것인가?


 


  자연현상을 일으키는 막대한 파워를 가진 자연과 곳곳에 존재하는 세상의 신비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인간이 종교의 힘을 빌어 대집단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종교의 권위가 집단의 리더에게 이식되어 카리스마 있는 제사장이 출현했다. 절대적 존재와 소통함으로써 그는 집단 내에서 정치적 권위를 보유할 수 있게 되고, 당위성을 띠는 집단 규범을 제시하는 존재로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원리에 대한 간단명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룰을 지배하는 자가 사회를 지배하는 법이다. 팽창을 원하던 인류 집단은 농경이라는 도박에 성공해 집단 수용 인원의 상한선을 올려놓았고, 더 많은 사람의 리더로 올라선 종교 지도자는 절대자와의 독점적 소통을 근거로 집단의 질서를 세울 규율을 만들었다. 농업에서 만들어진 잉여생산물을 통해 경제적으로 우위에 선 이들은 종교 리더와 손잡으며 사회 엘리트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신분제를 가진 도시와 국가가 만들어졌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여기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원초적 신앙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농경을 시작하며 절대자에 기도를 드리는 행위가 농사에 유리한 날씨가 되기를 바라는 목적성을 띠면서, 신앙이 도구적인 성질을 갖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인간의 간절함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심정을 신앙에 이입하며, 인간성을 가진 절대자를 그렸다. 그리고 엘리트들은 그들의 사회적 우위를 굳히기 위해 신앙을 이용했다.

  

  신앙을 중심으로 뭉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던 시절은 지나갔다. 농업과 상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풍요로워지며, 절대자에 대한 정신적 의존도가 서서히 낮아져 갔다. 자연이 변덕을 부리지 않아야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농부들보다 상인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노동에 구애받는 시간이 짧은 데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폭넓게 세상을 경험한 이들은, 기존의 믿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상업이 발달한 유럽 동남부에서 그리스 철학이 발원한 것을 우연이라 하기는 어렵다.


궁금증을 갖고 사유할 여유가 있었던 상인은 신앙의 약한 고리가 되어
세상을 설명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다

  고대 그리스의 현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뭉뚱그려 합리화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신의 뜻'이라는 쉬운 설명을 뿌리치고 제반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어려운 길을 간 것이다. 그들에게 절대자의 의지란 맹목적인 수용의 대상이 아닌, 논리적인 탐구와 검증의 대상이었다. 인간이 세상에 대한 인식을 수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이어, 스스로의 힘으로 인식을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이었다.


  인간이 본격적으로 대담해지기 시작한 것은 돈이 퍼져나간 이후였다. 재화를 이용할 권리를 부여하는 돈은 자유의 크기를 좌우했다. 간절한 믿음이 정신적인 위안을 줄 수는 있지만, 사람의 생활수준을 올려주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종교가 설치한 지배적인 사회 규범을 따르되, 현실에서는 돈에 이끌려 다니는 삶을 살았다. 입으로는 신의 말씀을 읊지만 손은 재물로 향하고, 가슴에서 믿음과 욕망이 상충한 것이다.


  절대자의 피조물 인간이 돈이라는 피조물을 만들더니, 피조물의 피조물이 창조자의 입지를 갉아먹는 상황이 펼쳐졌다. 비단 돈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인간이 도구와 기술을 개량하며 문명을 고도화하는 동안 맹수는 공포의 대상에서 사냥의 타깃이 되었고, 마을 인근의 산은 화전을 할 터전이 되었다. 에너지 사용량이 점점 많아지고 인간의 목적을 위해 개발하는 땅이 넓어지는 것은, 자연이 숭배의 대상보다 인간을 위한 도구적 배경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물질적 풍요는 세상 인식의 중심을 서서히
추상적 존재로부터 가시적 대상으로 옮겨 놓았다

  물질세계의 급격한 팽창과 그리스 문명의 부흥 운동이 겹친 르네상스 시대에 인식 전환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교회는 신의 말씀에 이익을 섞어 면벌부를 판매하기도 했고,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기시했던 크리스천들은 은행과 금융 상품을 가장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돈의 논리는 신앙마저 변형시킬 정도의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시대의 천재들이 밝혀낸 물리학적·화학적 발견은 세상이 신의 당위적인 창작이라기보다, 수리적으로 정교한 설계도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정신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연과 신의 입지는 근대에 들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끊임없이 물질적인 풍요를 가꿔 온 인간이, 마침내 스스로 정체성을 재정의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더 이상 자연의 미미한 구성원 중 하나가 아닌, 지성과 문명을 짊어진 특별한 존재로서 여타 생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전보다 많은 것을 가진 개인은 자신이 가진 것을 보호받길 원했고, 권리 의식의 신장은 다른 사회 구성원과 자신이 동등한 불가침의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친 여러 차례의 분쟁 끝에, 모든 구성원이 인간으로서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는 합의가 생겨났다. 절대적인 존재에 정신을 의탁하던 인간이, 이제는 하늘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아 신성함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천부인권은 신성함이 더 이상 추상적인 절대자나
자연의 전유물이 아님을 선언한 것과 같다

  인식의 전환은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문명을 이룩하고 만물의 작동 원리를 밝힌 인간은,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특별한 권리를 정의했다. 고등 지식을 가지고 자연에서 에너지를 추출해, 강력한 기계를 통제하여 세상의 모습을 바꿔가는 인간이 스스로를 독보적인 존재라고 인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신과 자연에 쏟아지던 찬미와 존중은 인간과 물질로 분산되었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권리의 분산은 '특별한 종'인 인간의 자부심을 한껏 끌어올렸다.



  수천 년의 노력을 통해 인간이 나약한 신봉자에서 성스러운 권리를 입은 고귀한 생명으로 거듭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히고 말았다. 찰스 다윈은 인간이 유인원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주장을 설파했고, 후대의 과학자들은 그의 주장이 옳았음을 유전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뇌과학은 인간의 신성함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근거인 자유의지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증거를 들이밀었다.


  인간이 고유의 신성한 혈통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진화한 유인원의 후예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사실은 본능과 자극에 기초한다는 폭로는 인간의 인식을 혼란에 빠뜨렸다. 신성함을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신성함을 공유하기까지 거쳐 온 고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과학은 문명 구축을 도와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자각을 품게 했지만,
동시에 인간 역시 DNA와 본능의 하수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제 인간은 난해한 과학 원리를 해석할 만큼 발달한 이성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기나긴 역사를 거쳐 설계되고 진화에 의해 수정된 DNA에 속박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겸허한 존재이다. 현대인은 우주의 물리학적 설계와 그 복잡함, 창대함에 경탄하며, 주위에 보이는 동식물들도 우리처럼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임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을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게 되었다.


  앞으로 인간에게 신, 자연, 인간은 어떤 존재로 여겨질 것인가? 인간이 특별하고 성스러운 존재라는 믿음이 무너졌으니,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신성한 존재를 희구하게 될 것인가? 숭배가 다음으로 전이될 대상이 생긴다면 그것은 경제적 자유를 결정하는 돈일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역량을 강화해줄 과학기술일 것인가?


  인간이 우주의 신비의 베일을 꽤 많이 벗겨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모르는 것이 많다. 우리의 인식을 바꿀 변수는 너무나도 많고, 변수 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관통하면서도 꺾일 줄 모르는 변화의 관성은, 앞으로도 인간이 규정하는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변형하며 목적지가 없는 끝없는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이전 02화 종교의 힘으로 도시가 싹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