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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17. 2021

인류사의 출발점, 인지혁명

사회적 동물, 인간이 먹이 사슬 최상단에 서다

  인류의 선조가 유인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언제부터 고유한 특질을 가지기 시작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약 300만 년 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프리카에서 활동했고, 그들의 먼 후손인 호모 에렉투스 그리고 그들을 계승한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사의 명맥을 이어온 것에는 큰 이견의 여지가 없다. 현생 인류는 몇백만 년을 버텨온 강인한 유전자를 품고 있다.


  맹수의 위협에 노출되는 야생 상태에서, 다른 동물에게 물리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만한 신체 부위가 마땅치 않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는가. 그에 대한 답으로 가장 흔하게 제시되는 것이, 자유로운 양손을 활용한 도구 사용과 군집을 이루는 사회적 능력이다. 역사 교육이나 교양서적에서 흔히 접하는 이러한 코멘트는 역사의 흐름을 빠르게 훑어보고 암기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양손을 다루고 그룹 단위로 뭉칠 수 있다는 점이, 어떻게 인간을 생태 피라미드의 중하위권에서 최상단으로 끌어올렸는지 즉각적으로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양손을 쓰는 사회적 동물이 또 있었다면, 우리의 선조가 아무 성과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그러한 시나리오를 반현실적 가정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이자, 무수히 많은 위협을 극복하고 인류가 독보적인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인지혁명'이다.




  역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인지혁명을 언어 사용 능력에 관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동일한 단어를 좀 더 광의의 개념으로 재정의해 보고자 한다. 존재감이 없는 자연의 일원이 자신들의 역사를 꾸려나갈 수 있는 강자로 도약하게 한 조력자는 추상적인 대상을 다루는 능력과 결속력을 강화하는 메커니즘이다.


  1백만 년 전의 인류가 사용했던 도구는, 한눈에 보기에도 조악해 보이는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보다도 열악했다. 도구 개발 초기 단계에는 위협 요소를 알리고 미리 피하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다. 주먹도끼의 열화 버전으로 사자에게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까지 진화하는 긴 구간 동안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도구의 개발과 발전은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먹이사슬 상의 역전극을 준비하는 동안 인간에게 시간을 벌어준 것은 바로 소통이었다. 우연히 포착한 맹수의 위치를 파악해 알리거나 익은 과일을 쉽게 딸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동료에게 정확히 전달해야 오늘을 넘길 수 있었기에,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갈고닦아야 했다.



  다행히도 인류의 구강 구조는 세세한 음형을 구분해 발음하기 유리한 구조였다. 약한 몸을 가진 생물로서 생존을 위한 협력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개별 개체가 필사적으로 소통 체계를 정밀화해야 했다. 치열한 서바이벌 끝에 그중에서도 특히 커뮤니케이션에 적합한 특질을 가진 이들만이 살아남았고, 그들의 DNA가 후대로 계속 뻗어가며 아이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언어를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마법으로 이어졌다.


  정보 전달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몸짓과 손짓까지 동원하면서, 인류는 언어적·비언어적 소통을 고도화할 수 있었다. 또한, 타인과 접촉하는 일이 많아지자 표정의 차이만으로 감정을 읽는 능력도 자연스럽게 향상했다. 일련의 변화가 집단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마찰을 조율하는 데에 힘을 보탰고, 인간이 다른 사회적 동물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협응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인지혁명은 이러한 일련의 발달 과정의 소산이었다. 위험 요소와 위치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은 추상적인 내용을 시청각적 메시지로 바꿔야 하는 어려운 미션을 부과한다. '죽음', '흐름' 같이 물리적 실체가 없는 것의 의미를 표현할 방법을 만드는 것은 굉장한 고민을 요구하는 일이었지만, 지능의 고도화와 언어 세계의 확장이 난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인간의 사고 능력과 소통 역량이 진전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수록 공동체가 필요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공유하여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다양한 이들이 모일수록 도구의 독창성과 수렵·채집 노하우가 누적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야생에서 강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초기 인류에게 서러움으로 다가왔겠지만,
그들은 코너에 몰림으로써 뜻밖의 횡재를 맞이할 수 있었다

  '뭉쳐야만 살 수 있는' 개인의 나약함은 언어와 집단화의 필요성을 강제했지만, 인류는 신체적인 파워와 기동력을 희생한 대신 지능과 단결력을 얻음으로써 장기적으로 생태 피라미드에서 최상위로 도약할 잠재력을 키웠다. 불을 손에 넣는 우연한 계기를 놓치지 않고 생태 피라미드의 최상위로 도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사적인 선택의 성공이 결정적이었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가지 사명을 다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개인이 한 집단 내에서 강한 결속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이 유독 강한 단결력을 갖고 대규모의 집단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추상적인 대상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었다. 코끼리도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치르지만, 사람은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넘어 영혼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상상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먼 조상들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키워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아귀에 맞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익은 인지 능력과 호기심, 그리고 현상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을 내리고 싶은 욕구의 결합은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다.


언어가 인지혁명의 뿌리라면, 스토리는 그 꽃에 해당한다

  공동체가 멤버들의 지적 능력을 총동원해 만들어 낸 이야기는 그들에게 일종의 세계관이 되어 줬고, 동일한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우리'라는 소속감이 굳어졌다. 혈족이라는 것 외에 같은 세계관이라는 공통분모가 추가됨으로써, 인간 집단은 외연을 확장하며 수용 인원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직접적 혈연이 없더라도 같은 믿음으로 연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동질감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먹이사슬에서 경합을 이겨낸 호모 사피엔스가 더 큰 덩치의 네안데르탈인마저 밀어내고 독보적인 최강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원숭이도 나뭇가지를 도구처럼 활용할 수 있으며, 돌고래도 초음파를 통해서 같은 종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또한, 하이에나 역시 큰 초식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무리를 이룰 수 있다. 남들도 갖고 있었던 강점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던 인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위 세 가지를 균형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동물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절박한 조건은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최대한 투입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탁월한 연상력으로 도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돌연변이가 나타날 때까지 긴 구간을 버티는 동안 다른 어떤 동물도 도달하지 못한 언어와 추상의 세계를 개척했다. 우리의 직계 선조 호모 사피엔스는 그 세계의 힘을 더욱 적극적으로 빌려서 닮은꼴인 네안데르탈인을 도태로 내몰았다. 양손을 쓰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최후의 승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있었던 것이다.


  자연선택의 누적은 인류, 특히 현생 인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냈다. 이족보행부터 동질감에 이르는 역사적 선택 중 하나라도 결여되었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먹이사슬의 중간 지점에서 질곡의 세월을 보내며 수많은 동족을 잃었지만, 인간이 종의 명운을 걸고 던진 여러 차례의 도박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네 다리 중 둘을 포기하고 근력 대신 지능에 베팅한 내기의 끝에서, 인류는 인지혁명이라는 '잭팟'을 터뜨렸고 역사를 주도하는 주인공으로 올라섰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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