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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22. 2021

고대사 최대의 쾌거, 화폐와 기록의 발명

인지혁명의 자식이자 상업혁명의 부모가 태어나다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은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들었을 때 그 시점과 의의를 말할 수 있겠지만, '상업혁명'이라는 단어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글쓴이 역시 대학교에서 경제사를 처음으로 공부한 2학년이 되어서야 이 말을 처음 접해보았다. 세계사에 대한 관심이 지금만큼은 아니었던 시기에 전공 수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생소한 단어를 접했던 순간, 부실하게 연결되어 있던 역사 지식들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광활한 역사를 탐구할 때, 비교적 잘 조명되지 않는 교과서 구석에까지 주목을 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이 될 법하다. 하지만 상업혁명은 인지혁명과 산업혁명을 이어주는 교량으로서, 그 둘과 맞먹는 파급력을 행사한 역사의 거인이다. 상업혁명 없이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집안의 가계를 펼쳐 볼 때 부모를 생략하고 조부모와 손자, 손녀만 소개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상업혁명은 머릿속에서 끊어진 연결고리를 재생하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진입장벽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역사의 전개도는 아주 명료한 형태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잉여생산물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고, 사회 내부에 권력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기억해야 할 것이 많아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벼 씨앗을 언제 파종하고 수확해야 하는지 감으로 맞추는 것만 해도 충분했지만, 이웃이 쌀을 빌려 주었다면 언제 얼마나 갚아야 하는지 정확히 기억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회 상류층은 평민들이 내는 세금을 규정에 맞게 부과해야 정치를 할 수 있으므로 더 필사적이었다. 인류 최고(最古)의 기록이 보리를 단위로 세금을 부과한 일종의 고지서였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기록의 효과를 십분 향유하며 더 많은 기억 저장이 가능해진 사람들이 시도한 다음 실험은 문자의 개발이었다. 점점 발달하는 문명과 함께 늘어나는 물산의 종류를 표현하고, 정보의 유실이나 왜곡을 줄여줄 도구가 필요했다. 정치적 약속을 지켜야 하는 사회 지도층과 신뢰도를 유지해야 먹고살 수 있는 상인들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보다 효율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강구하던 많은 집단 중, 가장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이들은 페니키아인들이었다. 해상 무역으로 경제를 유지하던 그들은 이집트와 레반트, 그리스 등 다양한 지역의 문명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수집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수백 년에 걸친 활발한 활동을 통해 페니키아에서 대표적인 표음문자 알파벳의 원형이 탄생했다.


20여 개의 자모의 조합만으로 물리적인 대상과 추상적인 관념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계속 추가되는 발명과 발견을 표현하기에 회화문자는 한계가 뚜렷하며,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자음과 모음을 배치하여 사회적 약속을 부과하기만 하면 새 단어를 만들 수 있는 표음문자는, 회화문자에 비해 팽창하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유연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패턴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림으로부터 시작된 기록 수단이 갑골문자를 거쳐 대표적인 표의문자 한자로 옮겨진 것이다. 비록 채택한 문자의 모습이 역사의 평행선을 달린 양 문명처럼 서로 달랐지만, 알파벳과 한자는 커뮤니케이션의 효율과 정확성을 향상하며 문명의 불가결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문자와 함께 역사의 쌍두마차를 이끌 파트너가 될 화폐 역시 곧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거래는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선사했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원을 내주고 부족한 자원을 받아옴으로써, 거래 참여 집단이 필수재를 더 균형 있게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시적인 물물교환은 너무나도 불편한 것이었다. 교역로 상의 산, 강을 넘어야 할 때 무거운 광물이나 목재를 옮기는 것은 수레와 동물의 힘을 빌려도 무척이나 고된 일이다. 특히 식재료처럼 변질이나 변형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운반한다면 힘들게 옮겨도 가치가 보존되지 않는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상인들은 화폐를 고안해 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아이디어였다. 예를 들어 거래 대상자들이 가치를 두고 합의만 하면, 무거운 쇳덩이나 소금을 이끌고 멀리까지 갈 필요 없이 작은 금속 덩어리 몇 조각으로 상대가 내놓은 품목을 구매할 수 있었다. 금속으로 만들면 식료나 목재처럼 외부 충격이나 날씨에 의해 쉽게 변질되지도 않을 것이었으며, 하나의 화폐를 기준으로 모든 물건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어 재화 간의 교환도 훨씬 직관적으로 할 수 있을 터였다. 기존 거래가 가진 불편함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기막힌 발상이었다.


  물론 거래 참여자 모두에게 지불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는 희소성과 내구성 및 운반의 편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금·은이나 비단 등을 화폐로 사용했다. 짊어질 짐이 한결 가벼워지자, 사람들은 강과 산맥을 넘어 희귀한 물품을 찾아 떠나는 도전을 해볼 만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육상 교역로는 문명의 규모와 상인들의 열망이 부풀어 오름에 따라 갈수록 그 길이가 늘어났고, 결국 중앙아시아를 교두보로 중국의 전한과 로마 제국이 이어져 실크로드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도시에서 인구와 번영의 정도, 혁신의 강도는 비례한다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각지의 상업 도시를 오가며 문물의 교류가 촉진되었고, 활발한 물자와 아이디어의 전래는 거래 참여자들의 생활수준과 문화 수준을 끌어올려주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국에서 온 진귀한 물산을 원할수록, 그리고 상인들이 원거리 무역에서 어떻게 더 큰 이득을 올릴지 고민할수록 거래비용을 감축하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다. 운송 비용과 운송 기간을 더욱 줄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사람들은 바닷길까지 개척해 대륙을 오갔다.


  신라에서 로마의 유리 공예 제품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새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과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들의 도전 정신은, 교통 통신 수단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대에 로마인들이 직선거리로만 해도 9000km가 넘는 동방의 어느 문명국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생업에 나섰던 이들의 손과 발로부터 문명의 교류가 시작되고, 문명의 새로운 단계가 출현할 수 있었다.


  화폐 개념을 고안한 선구자들의 뒤를 이어, 경제적 감각이 뛰어난 이들은 이전보다 나은 거래 수단을 계속 찾아냈다. 중세에는 은이 주류적인 화폐로 떠올랐고, 근대에 들어 동전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중심 화폐의 권위를 지탱해줄 강력한 정부와 규모 있는 은행이 나타남에 따라, 오늘날 사람들은 동전과 지폐에 일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갈수록 작아지고 가벼워지는 화폐가 거래의 효율을 한층 더 끌어올려 주었고, 거래비용이 낮아짐에 따라 이윤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넓어져 상업 활동이 더욱 촉진된 결과 모든 분야의 발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과거에는 비용 문제로 시도되지 않았던 것들에 경제성이 생김으로써 점점 더 많은 창조와 혁신이 발생했고, 이윤으로부터 발생하는 폭발적인 혁신의 동기가 오늘날 세계 문명과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은, 동전, 지폐. 더욱 편리한 거래 수단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화폐인 가상통화(암호화폐)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내재 가치가 불분명한 대상에 사회적 합의를 부여해 화폐를 만들고 그 형태를 점점 효율화하고 간소화하더니, 이제 아예 물리적 실체도 없는 데이터 조각을 거래 수단으로 취급하려고 하는 것이다. '현금 없는 사회'는 화폐 개념이 처음 생겨난 이후로 화폐가 가장 획기적인 변신을 준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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