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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23. 2021

아시아의 도약과 후발주자 유럽

문명의 태양이 동쪽에서 먼저 떠오르다

  쌀과 함께 고대사를 빠르게 주파한 동아시아가 이른 시점에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국가와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쇄술, 나침반, 화약이 모두 중국에서 발원했고, 우리나라 역시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과 금속 활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직지심체요절을 만들어 냈다. 또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대영 제국에 버금가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몽골 제국도 동아시아에서 출발했다.


  서방의 로마 제국이 4세기에 분열하고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사라짐으로써 서양인들이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는 1천 년 횡보의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이웃한 중동 지역만 해도 이슬람교를 원동력으로 하여 빠르게 문명이 성장하고 있었다.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교역을 해야 먹고살 수 있었던 중동의 상인들은, 무역 상대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을 키워 나갔다.


  세상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동방 문명이 세계 경제와 문화의 선두주자였다. 후발주자로 있는 동안 서방의 문명은 동쪽에서 쫓겨온 이민족에 의해 국운이 기울고, 종교적 성지를 이교도들에게 빼앗기고,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쌀과 밀의 차이로부터 시작된 레이스가 어쩌다 이렇게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불리한 판도를 뒤집은 서양 문명의 대역전극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중국에서는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황제를 중심으로 한 1인 지배 체제를 보존하려 했고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적으로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秦)의 시스템이 조금씩 변형되었을 뿐 계속해서 계승되었다.


  진의 위업 위에 수당 제국 시대의 뚜렷한 업데이트가 이루어진 것은 유목 민족의 영향이 컸다. 거대한 중원의 패권을 얻어 풍부한 물자를 장악하고 싶어 했던 변방의 이민족들은 기병의 위력을 앞세워 잊을 만하면 국경선을 넘었다. 중원의 혼란이 유독 심했던 위진남북조 시대에, 여러 국가들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벌이며 서로의 명을 단축시키던 타이밍을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수 문제가 진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며, 이민족 혈통의 왕조를 개창하는 데에 성공했다.


  춘추전국시대보다도 긴 혼란기를 다시 거치는 동안, 유목 민족이 중국화 과정을 통해 중국 대륙 문명에 융화했다. 비주류였던 이민족은 사회 상류층에 합류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혼란기의 재발을 막아줄 체제를 확립할 수단을 확장하길 원했다. 새로운 지배층의 의도는 불교의 전래와 세제의 정교화(조용조), 과거 시험의 도입에 반영되었다. 유목 민족의 호전성을 더한 중국은 활발한 대외 팽창을 시도하며 서역과의 교류도 점점 활력을 더해 갔고, 당대 최고 선진 문명의 만남은 양쪽의 성장을 가속시켰다.

 

  사막에서 흩어져 살던 유목 민족 집단을 하나로 묶어준 이슬람교는, 비록 기독교에 비해 출발은 늦었지만 매서운 성장세를 보였다. 세금만 내면 신앙의 자유와 생활양식을 존중해 주겠다는 제안은 제법 매력이 있었고, 이슬람에 귀의하면 공동체 움마에 속해 타인과 동등한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교리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강력한 흡인력으로 작용했다.


  빠르게 교세를 확대해 정복 활동을 치를 역량을 갖추게 된 이슬람 국가들은, 거침없이 이동해 10세기 무렵에는 북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 세 대륙에 발을 디뎠다. 확장을 거듭하면서 그들은 문명 발전의 날개를 달았다. 지중해 상권의 주도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과거 그리스인들이 남긴 기록과 서적들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돈과 지식을 순식간에 거머쥔 중동인들은 과학과 경제에서 모두 비약적인 지식의 확장을 이뤄내며, 수백 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을 압축적으로 이룩할 수 있었다.


  분명, 높은 수준의 물질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세상의 구성·작동 원리를 규명하는 성과를 먼저 거둔 쪽은 그리스와 로마가 있는 유럽의 문명이었다. 하지만 선대의 지혜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것을 더 잘 계승한 것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유럽의 기독교도인들은 십자군 전쟁에서 패해 예루살렘을 놓치는 서러움을 겪으면서도, 결국 이교도들의 발달한 지적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세계 경제와 문화를 선도하던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문명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유라시아를 초토화한 몽골족의 지배 아래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기도 했다. 몽골족이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마련한 역참제는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운행 네트워크를 제공해 주며, 상인들이 안전하게 장거리 교역로를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지방의 분란을 억제하기 위해 정비한 제도가 경제의 물꼬를 터준 것이었다.


동일한 지배 집단 아래에 놓였다는 공통분모가 형성됨으로써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사이의 교류가 더욱 자극을 받았다

  두 문명 사이의 선순환은 이 무렵 가장 크게 꽃을 피웠다. 교역로의 안정화로 물물 교류가 자극되자 중국의 화약과 나침반이 서아시아로 전래되었고,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한 이슬람 문명은 동아시아로 고도의 역법인 수시력을 전해 주었다. 나침반의 발명과 항해술의 발전으로 왕성해진 해상 교역은 중국 동부의 항만 도시인 취안저우를 당대 세계 최대의 항구로 만들어주었으며, 서아시아의 상업 허브인 바그다드는 최고 수준의 지식이 집결하고 동서로 온갖 물산이 오가는 세계 최대의 문명 교차로가 되었다.


  아시아 문명의 황금기에는 모든 것이 선순환하며 경제와 문화가 모두 순조롭게 성장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던가. 몽골족이 내부 분열로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역량을 잃게 되자 제국은 얼마 못 가 사분오열되었다.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준 구심점이 사라지자 동서 간 교류를 유지해 주던 시스템이 위축되었고, 양 문명은 다시금 독자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비록 세상을 호령하던 제국은 사라졌지만, 그 안에서 이룩한 압도적인 문명의 우위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중국의 왕조가 범한 뼈아픈 실책으로 인해 아시아는 그 우위를 금방 잃게 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몽골족을 밀어내고 중국 대륙을 장악한 명은, 우수한 문명을 이룩한 한족의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려 했다. 국가가 정비한 시스템 안에서 상인들이 왕래할 길을 열어 놓은 몽골 제국(원)과 달리, 명의 홍무제는 무역 자체를 국가가 철저히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국의 권위를 억지로 격상하려는 접근 방식이 유효하게 나타날 리가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유라시아를 평정한 몽골과 달리, 명은 중국 본토에만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태였다. 원보다 장악력이 떨어지는 왕조가 조공 중심의 무역 체계로 이전만큼 교역으로 많은 것을 얻기는 어려웠다. 또한, 국가가 민간 교역을 통제함으로써 부의 확대가 제한되었으며 문물 교류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세계의 발달한 학문과 서방의 발명품이 유입될 여지 역시 줄어들었다. 해금 정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해상 무역을 제한함으로써 명은 자유로운 교역으로 얻을 수 있었던 부를 놓쳤고, 이는 경제력과 국방력의 성장 잠재력이 잠식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중앙정부가 바닷길을 막아버리자,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밀무역을 시도했으며 심한 경우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하여 상업적으로 중요한 해안의 안정이 크게 악화하였다. 하지만 더욱 뼈아픈 것은, 명이 해금을 내세움으로써 당시에 막 전 세계 해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서양 세력의 눈부신 발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자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안일한 의식에 사로잡혀 현실 판도 변화에 대한 대처에 미흡했던 것이다.


  몽골족은 타 민족에 비해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진 것보다 나은 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들을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한 명은 한족의 영광을 되찾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자유로운 교류와 문물 수용에 대한 관대함을 유지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명은 결국 스스로의 발에 족쇄를 채움으로써, 동양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재역전을 허용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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