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할 무렵, 사람들은 저마다의 각오를 다진다. 일상에 더해볼 무언가, 혹은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한 계획을 구상하는 행위가 연례행사인 것은 이쪽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바람이 서늘해질 무렵에 2022년에도 연초 구상의 상당수가 공수표에 그쳤다는 사실을 자인해야 했다. 졸업을 앞둔 올해엔 작년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어야 했고, 색다른 활동에 도전했어야 했지만 마음속 외침은 대체로 형태가 되지 못했다.
물론 올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1학기에는 음악 이론을 처음으로 배웠고, 전공과목의 시험 전일에 문예 공모전에 내놓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기도 했다. 방학에는 쉴 새 없이 책을 읽어 두 번째 브런치북을 만들어냈다. 2학기가 시작한 직후에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어 보름 정도가 허공으로 날아가버렸지만, 새 방을 구한 뒤에는 중국어와 일본어 공부를 병행하면서 새롭게 시간을 채울 방법을 마련했다.
분명 생각나는 게 있으면 있는 대로 손을 뻗어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늘 마음속 한 구석이 파여 있는 듯한 불편함이 가실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올해 초에 설정한 목표와 지금의 모습과의 괴리로 인해 느껴지는 자책감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불편함의 근원이 어디였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글을 꾸준히 쓰기로 한 것은 앞으로 몇 번이고 과거를 떠올린대도 후회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내면의 강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확신을 지탱해줄 정신적인 지지대가 그 정도로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브런치북을 쓰면서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에 한탄을 했고, 다른 사람들이 쓴 좋은 글들을 볼 때면 꾸준히 노력한다고 해서 정말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이 두 손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심이 커질수록,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도 커져갔다. 세상이 이 몸뚱이와 그것에 결부된 가능성 같은 것을 제한하기 위해서 물리적이거나 운명적인 굴레를 따로 마련해 뒀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래의 모든 시나리오에는 그저 확률이 부여되어 있을 뿐이며, 바라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더 좋은 학교'와 '더 좋은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꿈을 버렸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대척점에 서 있을 만큼 다른 존재라고 늘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사이의 7년이란 시간이 유전자를 바꾸거나 했을 리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력에 대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빠르게 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같았다. 마인드와 삶을 통째로 바꿔줄 것 같았던 대학 교육도, 실패를 죄악시하고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내면을 바꿔주진 않았다. 우습게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마음 편한 대로 다른 존재에 위탁하고 있었던 셈이다.
단순하지만 떼어내기 힘든 어리석음을 털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가을날에 문득 가슴을 흔든 변덕 덕분이었다. 중간고사를 이틀 앞두고, 1년 넘게 만나지 못한 절친이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맥주 가게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가게에서 이런 일이 힘들다, 저런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현대인 특유의 하소연을 늘어놓다가 어느 순간 본론을 꺼내 들었다. 지역 맥주축제에 부스를 차려 참가한다는 말이었다.
이틀 뒤에 전공 시험이야. 타이밍이 참…
그는 이 대답을 완곡한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이내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때는 이쪽도 그러한 뜻을 가지고 전달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멀리 떨어져 사는 그와 재회할 기약이 없다는 사고 회로에 도달하자, 이틀 뒤가 전공시험이라는 말의 뜻은 이전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학교 근처의 지하철 역에서 내리지 않는 것으로, 결국 의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서울에서 오산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편도로만 두 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면서, 그 시간만큼 열람실에 더 머무르지 않은 대가를 시험 점수로 치르게 될까 두려웠다. 한참이 지나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겨우 불안을 반가움 뒤로 숨길 수 있었다. 그는 상호명이 적힌 옷을 입은 채로, 부스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열심히 맥주의 특징을 설명하고 시음을 원하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었다.
몇 년이나 알고 지낸 절친이었지만 그가 손님을 대하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외국인 손님의 질문에도 영어로 척척 대답하고, 에일류 맥주의 맛이 인상적이라며 대량주문을 하고 싶다는 고객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는 모습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를 볼 수 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업계의 일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방문객이 이룬 대기열이 빠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시간에 옆 거리에서 닭강정을 사서 들고 왔다. 기다리고 있던 마지막 손님이 스타우트 한 잔을 받아 들고 떠나자, 우리는 겨우 맥주 한 잔씩 기울이면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을 가늠하면서, 별달리 해 온 것도 없고 목적지조차 흐려 보이는 누군가와는 참 대조되는 삶을 산 것 같다는 말을 건넸다.
나도 내가 앞으로 어떻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난 술이 좋으니까.
술이 좋다. 그로부터 그 말을 들은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비록 그 말을 이루는 단어는 이전에 들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때 들은 한 마디는 대부분 맥락상 실없는 소리나 단순한 취향의 표시에 불과했던 과거의 표현과 달랐다. 분명 그는 일하는 것이 힘이 든다고 했고, 장사라는 것은 어렵기 그지없다고 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술이 좋다고 했다.
그와의 친분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가 절친에게 고의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짓을 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삶의 막막함을 매일 체감하고도 심지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와, 전공 한 과목에 대한 불안을 억제하지 못해 소중한 친구와의 만남을 유예하려 했던 자신이 비교되어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과연 그는 친구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날 7시쯤, 광운대행 1호선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 중에는 갖가지 맥주의 향이 스민 기묘한 냄새를 풍기는 옷을 입은 청년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복잡한 수식이 적힌 PDF 파일을 띄운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에는 친구로부터 받은 맥주캔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왼손은 불안 대신 신의를 움켜쥐고 있었다.
중간고사는 그런대로 잘 극복해냈다. 잘 모르는 곳에서만 시험문제가 줄줄이 등장하여 답안지를 절반도 못 채우는 것과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과도한 불안을 떠안는 잘못된 버릇이 고쳐지기 시작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버릇의 자리를 대신하는 무언가가 피어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 1학기에 어려운 전공과목을 수강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 대학원생 친구와 다시 만났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대학원 진학을 하나의 선택지로서 처음으로 권했던 사람이 그였다. 예전과 다르게 하고 싶은 것이 생겼지만, 조금 출발이 늦어진 것 같다는 말을 꺼내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스포츠 분야만 아니면 타이밍이 늦어서 도전을 못하는 것은 없는 것 같아.
옳은 말이다. 같은 전공인 경제학을 배웠지만 그는 훨씬 많은 것을 배웠다. 어려운 내용도 척척 이해하고 막힘없이 설명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부러워해야 할 것은, 그가 그 레벨에 도달하기 위할 만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의지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면, 이쪽에서도 그만큼의 투자를 할 수 있을 터였다. 과연 그도 친구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태껏 도전이 좌절로 끝난 이유를 외부에서 찾아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잃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된 탓임을 인정하고 있다. 도전에 따른 보상의 형태가 정해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어느 시점에 찾아올지 알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 해로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2022년은 불확실성에 따라붙는 불안에 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련하는 해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삶에서 도전이란 구체적인 일정과 도착일이 정해지지 않은 기나긴 여정일 것이다. 지금 분명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출발일밖에 없다. 이제 모든 것을 계획이라는 틀에 집어넣고 그것대로 되지 않는 것을 실패로 규정하는 삶을 버리려 한다. 배우고, 쓰고, 다시 배우고, 쓰고. 그 중간에 기대와 실제의 괴리가 끼어들더라도, 적성에 가장 어울리는 관성을 지키고 싶다. 그렇게 새로운 브런치북도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