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자, 그들이 당당한 세상을 바라며
지난 칼럼에는 강제와 이에 준(準)하는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지난 칼럼에 이어 성폭력 범죄의 기초적 이해를 위해 '위력'과 '위계'에 대해 두 가지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아가 '보호감독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룰 것이다.
강제나 준에 의한 간음 등은 피해자의 제한 없이 범죄가 되지만, 가해자가 위계나 위력의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피해자가 미성년자이거나 장애인인 경우에만 처벌되는 것이 원칙이다. 비장애인인 성인이 피해자인 경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보호감독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만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이처럼 보호감독관계의 존재 여부는 가해자를 위계나 위력에 의한 성폭력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사례 1. 위력과 보호감독관계
피해자 A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다가 한 편의점의 구직공고를 보고 편의점주 B에게 전화하였다. B는 A와의 대화를 통해 A가 반드시 구직을 해야 하는 형편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B는 A에게 자신의 집으로 오면 취업을 시켜주겠다고 하여 A를 유인하였고, 자신의 집에서 A를 추행했다.
'강제'에 미치지 않는 폭행이나 협박, 사회⋅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의사를 제압하는 것을 위력이라고 한다. 이처럼 위력을 이용하여 피해자를 간음하면 '위력에 의한 간음죄', 유사간음 하면 '위력에 의한 유사간음죄', 추행하면 '위력에 의한 추행죄'가 성립한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추행했고, 구직이 반드시 필요한 피해자에게 구직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는 가해자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한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위력에도 해당한다.
문제는 과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보호감독관계가 인정되는지 여부이다. 법원은 고용주와 피고용인, 직장상사와 부하직원과 같은 법률상 관계는 물론 고용주의 배우자와 피고용인처럼 사실상 관계에 대해서도 보호감독관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위 사례에서 법원은 비록 취업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구직자는 피고용인보다 더욱 불안정한 지위에 있으므로 고용에 대해 사실상 영향력이 있는 모든 사람은 구직자에 대해 보호감독하는 지위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가해자는 위력에 의한 추행죄로 처벌된다.
사례 2. 위계
15세의 피해자 C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또래의 남학생 B을 알게 되었다. C는 D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매우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여 사귀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D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자신을 심하게 스토킹하는 여성이 있는데, 30살 정도 된 선배(E)가 여중생과 성교를 하게 해주면 그 스토커를 떼어내 주겠다고 한다"라며 C에게 E와 성교를 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C는 E와 성교를 하고 싶지 않았으나, D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여 E와 성교를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D는 E가 꾸며낸 가상의 존재로, E는 처음부터 미성년자와 성교를 할 목적으로 1인 2역을 하여 C를 속였던 것이었다.
가해자 E는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이제 독자 여러분도 어떠한 성폭력범죄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순서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먼저 가해자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간음을 했음은 명백하다. 다음으로 가해자가 사용한 수단은 폭행이나 협박에 해당하지 않고 피해자가 항거불능에 빠져 있었음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강제나 준 또는 위력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해자는 피해자를 속였다. 이에 가해자의 행위가 위계에 해당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위계란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고 피해자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 법원은 가해자가 어떠한 행위를 성적인 행위가 아닌 것처럼 속인 경우에만 성폭력범죄에서의 위계로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의사가 정상적인 의료행위를 하는 것처럼 속여 피해자의 성기 등을 만지거나, 종교인이 종교적인 의식을 하는 것처럼 속여 피해자와 성교를 한 경우를 위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가해자가 장애인 피해자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준다고 속여 유인한 후 자신이 소개를 받을 사람이라며 성교한 경우, 미성년자에게 성교의 대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속여 간음한 후 돈을 주지 않은 경우에는 위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성교 자체에 대해서는 속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사례에서도 과거 법원의 태도에 따르면 가해자의 행위는 위계에 해당하지 않는다. 가해자는 성행위를 하게 된 경위에 대해 피해자를 속였지만, 성행위 자체를 속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8월 대법원은 이 사례에서 가해자가 성행위 자체를 속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성행위를 하게 되는 중요한 과정에 대해 속였다면 이는 위계에 해당한다면서 이와 맞지 않는 과거 판례들을 모두 파기하였다. 즉, 위계의 의미를 확장하여 가해자가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제 성폭력 범죄의 기본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었다. 다음 칼럼에서는 성폭력범죄의 가해자가 가중처벌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칼럼이 성범죄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데 필요한 용기를 심어주고, 나아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법적 권리를 통해 피해 회복을 하는데 '힘'이 되길 바란다.
*해당 칼럼은 필자가 2021. 9. 28. 로톡뉴스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