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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미킴 Apr 15. 2022

달팡쓰 내 사랑을 받아줘

    달팽이를 키우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원해서 키우게 된 것이니, 다른 사람 때문에 ‘된’ 일은 아닌데, 달팽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을 따라 내 몸이 키우게 되었다. 달팽이를 키우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런던에 온 이후로 식물을 키우는 취미가 생겼는데, 식물을 키우다 보니 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동물을 기록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앵무새, 거북이, 금붕어, 햄스터 등등 인기 많은 반려동물들을 떠올리다가, 관리가 어렵지 않고, 마치 움직이는 식물과 같은 동물인 달팽이가 떠올랐다. 달팽이는 조용하고 냄새가 나지 않으며,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아도 상처받지 않는, 현재 내 여건에 딱 맞는 동물이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아프리카 육지 달팽이가 반려 달팽이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종류 같아 보였다. 이 종류의 아프리카 왕 달팽이들은 성인의 손바닥 크기 정도까지 자랄 수 있는, 수명이 5년 남짓 되는 친구들로 식용 달팽이로 유통되기도 한다. 번식력이 좋아서 야생에 방생하는 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법이며, 미국에서는 일반인이 사육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다행히 이 달팽이를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나는 달팽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한 온라인 달팽이 가게에서 분양을 받았다.


    아프리카 왕 달팽이는 다양한 패각과 배발의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백와, 흑와, 금와 등으로 분류된다. 이 세 가지가 가장 대표적인 종류로, 백와는 흰 배발에 짙은 색 패각, 흑와는 짙은 색 배발에 짙은 색 패각, 금와는 흰 배발에 금색 패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금와로 골랐고, 달팽이가 먹을 밥과 집에 깔아 줄 흙과 이끼도 함께 주문을 했다. 달팽이는 로얄 메일 택배로 배송된다고 했다. 나는 살아있는 동물을 택배 상자에 넣어 보낸다는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달팽이 가게가 아마 가지고 있을 노하우를 믿어 보기로 했다.


    정말 도착했다. 나의 달팽이가. 로얄 메일 유니폼을 입은 남자의  손에 얌전히 들려서   앞에 초인종 소리와 함께 도착했다. 아마 로얄 메일 남자는 박스 안에 달팽이가 들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했을 것이다. 달팽이는 소리를  내니 말이다. 갈색 종이 상자 안에는 구멍이   뚫린 직사각 플라스틱 박스가 들어있었다. 플라스틱 박스의 뚜껑 안에는 스펀지 같은 이끼가 가득  있었고 달팽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달팽이가 나를 혹시 물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검지 손가락을 덜덜 떨며 이끼 사이를 휘저었다.  손가락이 바위에  부딪혔다. 바위도  손가락도 놀랐다. 나는 손가락을 화들짝 뺐고, 떨리는 마음으로 추돌사고가  지점을 들춰보았다. 거기엔 달팽이가 있었고,  달팽이는 나의 달팽이가 아니었다.


    사고 현장엔 짙은 밤색 소라 뿔이 어색하게 서있었다. 바위가 아니라 짙은 밤색 소라 뿔이었다. 우리는 서로 잘못된 소개팅 상대를 만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 실례지만 짙은 밤색 소라 뿔을 거꾸로 들춰보았다. 역시나 짙은 밤색 배발이었다. 이 달팽이가 아프리카 왕 달팽이 종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마존에 사는 독 달팽이라도 만난 것처럼 겁을 집어먹고는 뚜껑을 다시 닫았다. 현관에 당황스럽게 오도카니 서있던 나는 라이팅 때문에 달팽이가 일시적으로 검어 보이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내 방으로 올라와서 실례지만 다시 달팽이를 들여다보았다. 역시 짙은 밤색 소라 뿔이었다. 아무리 관대하게 보려고 해도 금색은 아니었다. 나에게 다른 달팽이가 잘못 배송되었다는 사실을 몇 분에 걸쳐 받아들이고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이 당황스러운 만남을 카톡으로 가족에게 보고했다. 또다시 실례지만 밤색 소라 뿔의 사진을 찍은 후 달팽이 가게에 이메일을 보냈다. ‘나는 금와를 주문했는데 위 사진과 같은 달팽이씨가 나에게 도착했다. 이것이 무슨 종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상황을 해결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이 밤색 소라 뿔을 다시 보내고 내 달팽이, 금와를 다시 보내 달라고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밤색 소라 뿔은 겁을 먹었는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나는 양송이버섯을 눈에 띄는 곳에 두었다. 이 달팽이를 다시 보내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구석에서부터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빨강 머리 앤의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자라나기 시작했고 매튜 아저씨의 차마 그러지 못했던 마음이 내 마음을 찰방찰방 채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많고 많은 집 중에서 내 집을 기특하게 잘 찾아왔는데 다시 돌아가라고 하는 건 너무 매정한 걸까?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인데 키워볼까? 근데 얘가 무슨 종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키워.’ 엄마의 카톡이 내 생각에 끼어들었다. “까망이도 예뻐. 잘 키워.”


    달팽이 가게는 사진 속 밤색 소라 뿔은 흑와라고 했다. 아마 잘못 배송된 것 같으며, 주문한 금와를 다시 보내줄 테니 그 달팽이는 가지라고 했다. 아무래도 4파운드짜리 달팽이를 그보다 비싼 돈을 주고 다시 받는 것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나는 사전 조사를 통해 달팽이는 자웅동체이며, 두 마리 이상을 같이 키울 경우 한 번에 100개에서 300개의 알을 낳아 80% 이상의 부화율로 수많은 아기 달팽이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흑와를 다시 보내지 않는 선택지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굳이 다시 보내겠다고 해야겠지? 아니면 금와를 보내지 말라고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달팽이 두 마리를 같이 키울 순 없고, 내가 원래 주문했던 내 달팽이를 키우고 싶었다. “그러면 밤색 소라 뿔 아니 흑와는 어떻게 해? 다시 가라 그래? 빨강 머리 앤도 다시 집에 안 갔잖아. 나는 매정한 사람이야?”


    결국 달팽이 집을 하나 더 주문했다. 이것이 두 달팽이를 포함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결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흑와를 다시 돌려보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여전히 금와를 만날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생각했던 색깔이 아니라고 다시 돌려보내는 것은 달팽이 종 차별주의자와 같은 행동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마주쳤고, 나는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신원이 파악되기 전보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밤색 소라 뿔을 다시 쳐다보았다. 몸을 반쯤 꺼내서 양송이버섯을 천천히 녹여 먹고 있었다. ‘이 녀석 걷는 것만 느린 줄 알았더니 행동 자체가 슬로우 모션이구만.’ 그렇게 생각하니 낯선 흑와가 조금 귀여워 보였다. 살짝 녹은 나무늘보 같기도 했다. 이제 보니 흑와는 아주 멋진 무늬의 패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내가 어렸을 때 아빠가 사주던 초콜릿이 생각났다. 아빠는 출장을 갔다 오면 꼭 공항에서 조개, 해마, 불가사리 모양의 마블 초콜릿들이 들어있는 길리안 사의 초콜릿 박스를 사 왔는데, 내 흑와는 그 소라 모양 마블 초콜릿과 아주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흑와 길리안이 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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