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입술에 닿기 시작했던 2019년 11월의 셋째 주, 무작정 짐 한 보따리를 싣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나라의 땅을 밟았다. 무연고인 여름 나라에서 무언의 희망을 품었던, 날갯짓이 서툰 아기 새였던 서른 살의 나. 시작은 그저 미약했던 ‘말레이시아 생존기’ 프로젝트였지만, 어느덧 이곳에서 햇수로 6년 차 여름 나기를 하고 있다. 서른 중반인 지금의 나에게 놀라며 과거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러나 이제는 평생의 인연으로 이어갈 말레이시아와의 관계. 왜 하필, 그리고 어쩌다 말레이시아였을까?
한때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소녀는 서른쯤 말레이시아에 지사로 있는 어느 글로벌 회사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G라는 거대 기업의 광고를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디지털 마케팅 컨설턴트로 또 다른 경력의 시작을 알렸다. 미국 드라마 <가십걸>의 주인공인 ‘블레어’처럼 영어로 멋들어지게 대화하고, 한 손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들며 걸음이 당찬 커리어우먼을 꿈꿨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애초에 한국 시장을 겨냥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주 고객은 한국인이었으며, 대부분 소위 말하는 진상 고객이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불안했던 자아는 땅굴로 잠식해 버렸다. 이전 회사보다 더 나을 거라 기대했던 다음 직장에서는 말벌에 수없이 쏘이는 듯한 가스라이팅으로 온몸이 성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게다가 역사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전례 없는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머릿속으로만 맛보았던 솜사탕 같은 해외 생활은 그야말로 불닭볶음면처럼 맵싸했다. 더는 말레이시아에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의 남편인 ‘라이언’을 만나며 나의 세상이 뒤집혔다(남편이 카XX 캐릭터인 라이언을 닮아 앞으로 남편을 ‘라이언’이라 칭하겠다.). 라이언은 말레이시안 차이니즈로, 말라카에서 나고 자란, 팔불출인 나에겐 홍콩 배우인 ‘양조위’처럼 잘생기고 건실한 청년이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풋사과처럼 연애를 시작한 우리. 둘만의 미래를 그리기 위해 말라카로 떠나야 한다는 그의 선택으로 우리는 코시국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장거리 연애를 유지했다. 장거리 연애로 관계가 소원해질까 속으로 염려했던 것도 잠시, 그의 굳건하고 한결같은 사랑은 타향살이에 켜켜이 쌓였던 외로움을 떨쳐내었고 보잘것없는 인생에서 핑크빛 봄꽃을 피워 변곡점을 맞이해주었다. 지금은 말라카에서 말라카 새댁으로서 라이언과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며 뒤엉켜버린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끼고 쓰디쓴 고배를 여러 번 마셨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라이언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가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랑을 받는 법과 주는 법 또한 배웠다. 딱풀처럼 끈적이는 땀으로 여름을 싫어하는 내가 연중 내내 한여름인 말레이시아에 머물기로 한 이유도 그에게 있다. 그와 함께하는 지금의 삶은 고요한 호수와 같다. 특별한 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그저 또 하나의 하루에 불과한 일상이 그가 있어 행복하다.
“왜 하필, 어쩌다 말레이시아였을까?”에 대한 답은 여전히 명쾌하게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려고 이곳에 와서 초석을 쌓아야 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우리의 러브스토리와 신혼생활을 간직하기 위해 지금 타자기를 치고 있다. 앞으로 이 공간이 나의 일기장이 되어 이름 석 자를 가진 누군가로서, 말라카댁으로서 혹은 말레이시아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방인으로서 신혼생활을 톺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