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 존재를 잊기 쉽다."라는 뜻을 의미하며, 인간 심리와 관계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표현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이 자연스럽게 잊히거나 그에 대한 감정이 희미해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롱디, 장거리 연애를 겪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반영하기도 한다.
나의 연애는 늘 롱디였다. 라이언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우리는 롱디를 유지했다. 라이언이 주말마다 말라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오거나 내가 연휴에 맞춰 말라카로 내려가 한시적으로 재택근무를 하곤 했다. 주중에는 영상 통화로 외로운 밤을 달랬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 짧게는 10분, 길게는 2시간씩 휴대폰 화면 속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서로의 국가를 번갈아 방문하며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하고 데이트를 이어갔다.
그러나 약 3년간 이어온 이 롱디에는 위기가 세 번 있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로서 감정이 예민해진 내게 더욱 힘들게 다가왔다. 첫 번째 위기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코시국으로 인해 3개월간 주(state)간 이동을 금지했을 때였다. 라이언과 연애한 지 약 1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목이 퉁퉁 붓고 39도 가까운 고열이 나더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혼자서 끙끙 앓다가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라이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정부의 이동 제한으로 말라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올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원격으로 부른 구급차를 타고 혼자 입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 다행히 퇴원할 때쯤 락다운이 풀려 라이언이 퇴원 절차를 도와주었다. 당시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때의 서러움이 다시금 밀려온다.
영상 통화로 대판 싸웠던 날이 두 번째 위기였다. 무엇으로 그렇게 날을 세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은 얼음장이 되었고 라이언과의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다. 주말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문자로만 안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사만 확인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는 곧 막을 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쿠알라룸푸르로 한걸음 달려와 멋쩍은 미소를 짓는 라이언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고,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마음속 얼음장이 녹아내렸다. 감정의 골이 깊어 세상이 무너질 것 같던 사랑싸움은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으로 끝났다.
세 번째 위기는 반려견 하루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 인생의 암흑기를 보내던 시기였다. 4년마다 찾아오는 라이언의 2월 29일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신혼집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그런데 내가 없는 사이 심장병을 앓던 노견 하루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하루는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살면서 소중한 존재의 생명을 잃어본 적이 없던 나였다. 우리 가족에게 늘 행복만 주던 하루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니 삶의 의미가 모두 사라졌다. 천사 같던 하루가 없는 이 세상에서 무슨 부귀영화가 있겠나 싶었다. 덧없는 인생에서 미래가 과연 중요할까 싶었다. 지난 5년간 말레이시아에서 내가 하루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하루가 나를 더 많이 그리워했을 거라는 생각에 미안함과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마음의 병을 얻었다. 결혼식을 올리기 3일 전에는 이석증까지 앓게 되었다.
라이언은 그런 나를 걱정하며 매일같이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빛을 피해 숨어든 동굴 속에 있던 내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그는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흔들리는 나를 단단히 붙잡아준 것도 그였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그의 따뜻한 위로 덕분에 나는 삶의 빛을 되찾았다.
롱디는 그렇다. 물리적 거리가 두 사람 사이에 있어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과 신뢰, 대화 덕분에 오히려 감정적 유대는 깊어지고 사이도 애틋해지는 것이 바로 롱디다. 라이언과 내가 그랬다. 물리적 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했다. 그와의 장거리 연애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페이지를 펼치게 해주었다. “Out of sight, closer in mind." 눈에서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