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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녜 Oct 29. 2024

우당탕탕 상견례

고된 일정 끝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싱가포르에서 프러포즈를 받은 후 곧바로 양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들은 상견례 이야기를 꺼내셨고, 마침 우리 부모님의 말레이시아 방문 일정과 맞물려 상견례 날짜는 순식간에 잡혔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다. 팀장으로서 과중한 업무를 소화하던 중 다시금 공황장애가 나를 덮쳐왔다. 매일 밤 일과 관련된 꿈을 꾸며 숨이 막혀 한밤중에 깨어나는 날들이 이어졌다. 출근길마다 눈물을 삼키며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불안 속에서 교통사고라도 나길 바라는 위험한 상상까지 했다. 이런 나를 보며 라이언은 토닥였다. 결국 퇴사를 결정하고 자유의 몸이 된 나는 상견례와 더불어 자연스레 가족 여행 계획까지 추가되었다. 그렇게 우당탕탕 상견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가족 여행부터 상견례까지 약 한 달간의 일정을 계획했다. 라이언이 가족 여행의 일부 일정을 함께하겠다고 나서며 쿠알라룸푸르와 상견례 장소인 말라카까지는 윤곽이 잡혔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바로 아래 있는 싱가포르까지 여행하고 싶다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비행기, 호텔, 맛집, 관광지를 하나씩 알아보며 2박 3일의 일정을 새롭게 계획해야 했다. 여기까지는 오히려 괜찮았다. 싱가포르를 사랑하는 나에게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은 프러포즈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의 설렘을 다시 꺼내는 기분이었다. 상견례 장소는 말라카의 페라나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고급 뇨냐 식당으로 예약했다.





  이렇게 계획을 하나둘 세워갔지만, 정작 불안했던 건 상견례였다. 양가 가족 구성원 수를 합쳐 총 9명을 위해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통역해야 할 생각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처음에는 수고를 덜기 위해 통역사를 고용하자는 라이언의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양가 가족이 처음 모이는 자리에서 낯선 이를 초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 우리 가족과 친분이 있는 베스트프렌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상견례 날이 다가오기까지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우리 가족은 밤 비행기로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했고, 그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먼저 단골 딤섬집에서 가족들 모두 엄지를 치켜세우며 맛있게 딤섬을 즐겼다. 식사를 마친 후 관광지인 바투 동굴을 방문했다. 비둘기와 원숭이들이 정신없게 굴었지만, 신비로운 자연과 종교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동굴을 떠나자마자 여름 나라답게 비가 쏟아져 피신한 카페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저녁은 1919 식당에서 마늘 새우볶음, 공심채 볶음, 두부 요리, 미역국으로 푸짐하게 먹었다. 그렇게 쿠알라룸푸르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 날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라이언과 함께라서 그나마 마음이 괜찮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온전히 내가 가이드를 해야 했기에 가족을 이끌어야 할 책임감과 부담감이 배가 되었다. 2박 3일의 일정이었으니 다소 강행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덥고 볼거리는 많아 지치기도 했다. 어떻게든 마지막 날까지 일정을 소화하고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왔다.


  상견례 전날에는 버스를 타고 말라카로 향했다. 그곳에서 라이언을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말라카 로컬인 남편의 진두지휘 아래 존커88에서 락사와 첸돌을 맛있게 먹고 코코넛 셰이크를 입가심으로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대망의 상견례 날. 페라나칸 식당에서 시댁과 우리 가족의 상견례가 진행되었다.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양국에서 치를 결혼식 일정을 논의하고 뇨냐 음식을 음미했다. 중간에 친구가 통역을 도와줘 분위기는 훨씬 안정적이었다. 지금 이 글에서 그 친구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상견례가 끝나고 긴장이 풀렸는지 몸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컨디션이 악화되었다. 아마도 그동안 가족들의 요구에 맞추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일 것이다.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온 다음 날에도 몸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결국 병원을 찾았다. "극심한 인후염과 면역력 저하"라는 진단에 몸이 지친 걸 인정해야 했다.


  집에서 쉬고 있는 사이 라이언은 우리 가족의 쇼핑을 도맡았다. 쇼핑에 진심인 가족과 함께하느라 그가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컨디션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우리는 잘란 알로로 나가 해산물 요리를 싹쓸이했다. 과일도 장바구니에 담아 까먹으며 길거리에서 시간을 유유히 즐겼다.


    드디어 가족이 떠나는 마지막 날. 우리는 센트럴 마켓에서 기념품을 사고 부모님의 숙원사업이었던 페트로나스 쌍둥이 타워에서 인증 사진을 찍으며 여행의 대단원을 장식했다.


  이렇게 우당탕탕 상견례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예상치 못한 일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한 편의 드라마로 남았다. 상견례라는 큰 산을 넘은 우리는 이제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갈 준비를 마쳤다. 앞으로의 시간은 또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질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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