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직장이 생겼다.
이번에는 중환자실이다.
물론 구직하는 3주간 마음이 지옥이긴 했지만, 사회가 불경기인걸 감안해 타직종 구직자들에 비해 아주 빠르게 재취업했다. 한편으로 면허증의 위대함을 깨우쳤다.
가족들이 말했다. 나의 방황이 빠르게 마무리된 것에 안심하는 한편 걱정의 목소리를 냈다. 한번 울며 때려치고 나왔으니, 다음도 이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작은 불안이되기도 했다.
'거기서 그랬는데, 더 힘든데 가서 하겄냐? 그냥 여기서 작은데서부터 다니라니까. 중환자실이면 엄청 힘들다던데...'
점차 기운을 차리고, 생각 정리를 하고, 차차 상처가 떠오르지 않을 때쯤에는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중환자실을 가고 말겠다는 오기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병원에 가면 처음부터 중환자실을 가고 싶어했다. 물론 그렇다고 울면서 때려치고 나온 첫직장이 싫었는 건 아니었다. 조혈모세포이식실은 조금 특수한 병동이었고 배울 것도 많은 곳이었다. 애초에 나는 직장인이고 배정되어 거기서 일하라 하면 일해야 하는 것이니, 처음 배정된 조혈모세포이식실에 어느정도 만족했다. 51병동, 61병동 이렇게 흔한 병동이 아니라 말그래도 이식을 받는 특수한 병동이니까.
그러나 나에게 첫번째는 결국 시행착오로 남게 되었다.
어쩌면 공부를 하던 중, 점차 흥미를 잃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혼나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 하나로 하는 끝없는 공부는 어느 순간 내 손에서 벗어났던 것 같다. 물론 이 마음은 합리화다. 직장에 흥미가 어디있는 가, 공부던 뭐던 내 몸 하나 건사하고 돈벌려면 해야 했다. 이 모든 건 나의 의무였으며 충실히 행할 의무의 무게감을 몰랐다. 그저 해야한다.
그 해야한다, 라는 마음을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곰곰히 고민했다. 나의 이 수많은 걱정과 불안을 의무로 여기기로 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머리에 무언가 깃발 하나가 꽂힌 느낌이었다.
이 의무로 여기기로 했다는 걸 어떻게 이야기할까 싶은데 우선 내 직업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한동안 내 직업관에 대해 고민했다. 여기에 설명하며 차근차근 내 생각도 정리하고 싶었다.
간호사라는 직업이 설명하기 어렵다면 어려운 직업인데, '부가 설명'에 놓인 직업이기 때문인 것 같다.
입원한 환자가 아프다. 그럼 약을 먹는다. 약을 먹고 낫는다. 이 단순한 세 문장이 우리가 아는 치료의 과정이며 이를 놓고 봤을 때 환자와 의사 사이의 소통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픈건 의사가 낫게 해준다로 아주 간단히 통일된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약을 준다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가?
의사가 환자의 아픈데를 어떻게 아는가?
아픈데를 낫게 해주는 약에 대해 환자에게 부작용이 없는가?
약은 어떻게 줄 것 인가?
주려는 약이 확실하게 이 약이 맞는가?
환자가 약을 먹거나 맞을 수 있는 사람인가?
환자가 약을 먹고 증상이 완화가 되었는가?
약 자체에 다른 부작용이 없는가? 그 부작용이 환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그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해 또 줄 수 있는 약이 있는가?
약은 딱 한번만 주는 건가? 아니면 매일? 언제까지?
등등..
단순한 세 문장 사이에 위와 같은 물음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 물음을 생각해야 하는 직업이 간호사이다. 간호사가 이 물음에 대해 확답을 하는 건 아니나, 의사와 상의하거나 노티해서 의사가 약을 처방하기 전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그 과정 아래 약을 주게 되는 건 간호사이고, 그 만큼 중요한 역할이다.
즉 이 말은 간호사는 의사가 처방을 낼때 의문을 가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다. 의사도 사람이고,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한번 걸러내기 때문에 왜 처방이 났고, 이 처방에서 어떻게 해야하고, 뭘 주의해야 하고를 잘 알아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약의 부작용이 뭔지 모르고 환자에게 무작정 주게 되면 환자에게 부작용이 생겨도 왜인지도 모르고 허둥 거리며 악화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면 환자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른채,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내가 못하면 어쩌지? 라는 불안이 하루하루 쌓여갔다.
이 모든 걸 지워버리고 생각도 하지말고 앞만 생각하라는 데 도저히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그냥 안고 가기로 했다.
불안이라는 건, 당장 앞에 해야하는 일을 할때 나아진다. 그건 내가 여태 수많은 불안을 잠재울 수 있던 방법이었다. 그만큼 알면된다. 그만큼 술기에 능하게 되면 된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익숙한 처음을 맞이하면 된다.
내가 모르면 모른만큼 환자에게 생기지 않아도 될 이벤트가 생길 수 있다. 그 불안이 모여 이 한 문장이 되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문제였던 것이지 어쩌면 이 불안들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만 보자.
불안한 만큼, 알면 돼. 모르면 묻고 공부하고, 부족하면 또 공부하자. 잘하려는 마음, 인정받고자 하는 문제는 환자만 생각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였다. 지금 당장 잘한다는 말을 들어 봤자, 언젠가 환자에게 피해를 주게된다면 다 쓸모 없는 말이었다.
환자를 기준으로 공부하자. 이타적인 마음이라기엔 애매했다. 나는 전인적으로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의 대상과 주체는 환자이니까.
꾹꾹 다짐했다.
두번째 직장에서, 나는 과연 이 다짐을 실행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