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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린 Jun 02. 2024

외국계 증권사에 다니는 회계팀 대리는 무슨 일을 잘할까

PART 1. 금융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을 줄 알았지 (1)


첫 직장은 광화문에 위치한 외국계증권사였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기도 했고, 금융업계에 취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니 꽤 괜찮은 시작이었다. 다만, 내가 재무회계부서에서 일할 줄은 몰랐다. 사실 회계는 내가 대학 때 (정말)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었다.


경영학 전공을 선택하면, 크게, 마케팅, 생산관리, 국제경영, 인사조직, 재무관리, 회계 등 6가지 영역에서 기초 과목을 필수 수강하고 그 외에는 자신이 집중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하여 수업을 듣는다. 내 경우에는 소비자행동론, 마케팅전략론 등 마케팅 관련 수업을 가장 많이 들었던 반면, 회계기초과목인 ‘회계원리’ 수강조차도 고역이었다 (심지어 재수강을 했다).


나와 회계 간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이었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커리어: 일로 하는 회계는 재밌다


어찌 내 마음대로만 되는 것이 있을까. 어쩌다 보니 나는 재무회계부서에서 커리어를 쌓게 되었다. 외국계증권사의 경우, 공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순환보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개채용보다는 헤드헌터를 통한 채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석이 있는 자리에 사람을 채우는 방식으로 채용을 하기 때문에 채용 직후 별도의 신입 직원 교육 없이 바로 업무에 투입되면서 일을 배워 나간다. 나 역시도 일을 시작한 첫날부터, 바로 실전에 투입되면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릴세라 꼼꼼히 노트에 업무 과정을 기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 번 그 직무를 시작하면 그 분야로 쭉 경력을 쌓아나간다. 광화문에는 여러 외국계증권사들이 모여있는데, 이 증권사들 간의 이직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직을 하면서, 직급과 연봉을 올려나간다. 그 말인즉슨, 나는 재무회계 분야로 나의 커리어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로 하는 회계는 꽤 재미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왜 학교에서는 그리도 회계 과목을 싫어했는 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일관되게 어떤 것을 배울 때, 학습의 당위성이 납득이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실제로 회계 처리가 일어나는 현장에 대한 감이 없으니, 계정 과목을 외우고, 회계 처리 방식을 외우는 것이 그저 지루했다.


실무는 달랐다. 실제로 발생하는 거래들에 대해서 어떤 계정 과목이 사용되는 지를 결정하고, 차변과 대변을 맞추어가며 기입하는 것은 지극히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으며, 심지어 쾌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 계정과목은 한자어(예. 미수금, 가수금, 미지급금, 가지급금)로 되어 있어 바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영어로 된 계정과목은 받아야 하는지 혹은 주어야 하는지 (예. receivable, payable) 등 오히려 직관적이었다.


일이 돌아가는 방식이 이해가 되고 흥미가 생기자 나는 회계 분야에서 커리어를 잘 쌓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났다. 그래서, 미국 공인회계사(USCPA)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다. 몇 백만 원의 수강료를 한 번에 내야 하므로,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내게는 큰 투자였다.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회사 근처 USCPA 학원에 바로 등록을 했다. 대략, 주 3-4회를 퇴근을 하고 나서 바로 학원으로 가 수업을 3-4시간 듣는 일정이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부족해 김밥 한 줄로 대충 때우고, 졸린 눈을 비비며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수업은 재미있었다. 회사에서는 미처 배우지 못했던, 내 일에 대한 이론을 배울 수 있었고, 오늘 내가 처리하고 온 거래의 논리를 스스로 납득할 수도 있었다. 학원에서 배운 것을 일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게 되면서, 회계에 대한 내 역량이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이 생겨나자 신도 났다.


회계 업무의 묘미: 숫자 속 숨겨진 이야기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회계 업무를 하면서 가장 재밌다고 혹은 보람이 있다고 느꼈던 기억들을 소환해 냈다. 일의 종류는 다른 것들이었지만, 묘하게 한 줄로 꿰어지고 있었다.


숫자가 잘 맞아떨어질 때보다는, 숫자가 잘 안 맞아떨어질 때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일

기존에 없던 거래가 발생한 경우, 어떤 계정과목을 쓰는 것이 적합한지를 고민하고 상사와 논의하는 일

내가 상사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글로 풀어나가는 대신 압축하여 표로 만드는 일

1년에 한 번, 정기 회계감사 기간 중에 회계사들의 질의에 답하기 위해서 자료를 준비하고 설명하던 일



나는 재무제표 혹은 회계 원장에 기입된 숫자들이 오류 없이 가지런히 맞춰지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크게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기존에 없던 일 혹은 문제라고 생각되는 일을 나서서 해결하는 일, 해결하기 위해서 나의 논리를 세우고 설명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내가 회계 업무를 하며 재밌다고 느꼈던 것은 사실 회계 자체보다는 논리적인 방식의 문제 해결 위주의 업무들이었다.


소름 돋게도 지금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일을 하지만, 여전히 나는 여전히 그 지점에서 가장 일이 재밌다고 느낀다. 내가 어느 분야에 있는 것과는 무관하게 일이 가장 재밌다고 느껴지는 경험의 집합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걸 식별한다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에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회계 업무로 키운 +@ 커리어 역량: 증권업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엑셀(Excel) 기술


회계에 대한 지식, 실무 등 회계 자체 역량 외에도 회계부서에서 일했기에 배운 것들이 있었다. 첫째는 회사의 전반적인 비즈니스가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근무했던 외국계 증권사는 해외 기관투자자를 고객으로 하는 주식 중개 트레이딩, 애널리스트들이 보고서를 내는 주식 리서치, 기업 M&A 관련 업무, 고액 자산을 가진 개인고객의 자산 관리, 회사 자본을 활용하는 프롭 트레이딩 등 여러 가지 비즈니스를 영위하고 있었다.


회계 부서에서는 각 부서에서 일어나는 매일의 거래들을 기록하기도 하고, 부서에서 집행하는 비용들을 검토하기도 한다. 비록 내가 보는 것은 숫자와 영수증들이지만, 이들 비즈니스가 각각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려볼 수 있다. 프롭 트레이딩의 경우에는, 매일의 거래량, 수익, 손실이 보였고, 기업 M&A 같은 경우에는 매일 거래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거나 비용 영수증을 보면 어떤 클라이언트와 주로 일하는지 등 머릿속에 비즈니스 활동 등이 그려졌다. 하나의 기업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비즈니스 활동을 하나의 그림 안에 아울러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귀중한 경험일 테다.


둘째는 엑셀로 말하고 설명하는 것을 배웠다. 신용위험, 시장위험 등을 관리하는 분들처럼 마크로를 짤 정도의 능력은 못되었지만, 내 업무의 90% 이상은 엑셀과 함께였다. 상사에게 보고할 때, 다른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할 때도 주로 활용하는 것은 엑셀 파일에 표를 그리고 숫자를 채워 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여러 유용한 툴들을 배웠고 익혔다. 그래서 나에게 엑셀로 일하는 것은 익숙하고도 편한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나중에 국제개발분야로 넘어와서 보니 업무에서 활용하는 문서툴은 주로 한컴오피스, MS 워드, 파워포인트 등이었고 주로 글로 서술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엑셀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내가 나서서 일을 맡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회계가 아닌 영역에서는 엑셀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독특하고 내세울 수 있는 역량이었다.





나는 회계부서에서 총 3년을 일했다. 회계를 일로 하는 것은 일 자체에도, 그리고 배움의 과정에서도 분명 재미난 지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하와이까지 시험을 보러 갔지만 미국공인회계사(USCPA) 자격증은 따지 못했다. 이미 내 마음속에서는 국제개발이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일까?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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