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금융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을 줄 알았지 (3)
내 커리어를 소개할 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공통적으로 물었다.
"금융 회사를 다니다가 어떻게 국제 개발 분야를 올 생각을 했어요?"
마음의 변화와 좋아하는 일의 만남은 운명적으로도, 순차적으로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라는 게 존재할까를 고민하던 시점에 나는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고, 고민이 깊어질 무렵과 겹쳐져 '국제개발'이라는 키워드가 내게 나타났다.
이번 장은 내가 국제개발이라는 분야를 어떻게 알게 되었고 업으로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일을 찾게 해 준 네 가지 방법'으로 정리해 본다.
1.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독서가 가져오는 변화는 꽤 크다.
때마침 그 무렵은 나만의 자유의 시간이 꽤 주어진 시기였다. 그래서 퇴근 후 회사 건물 바로 옆에 있었던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르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회사에 다닌 이후로 책을 잘 읽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시간이 생기니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나는 유년 시절에는 책을 무척 좋아했었다).
교보문고 섹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정치/사회 섹션에 발길을 멈췄다. 홍보 대상 책들은 모두 앞표지를 위로하고 나란히 누워있었는데 그중에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이었다. 당시 '세이브 더칠드런'에서 하던 '모자 뜨기 캠페인'에 참여도 해보고, 작은 돈을 기부도 했었지만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정도였지, 그들의 빈곤 문제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마 딱 그 연민 정도의 관심사에서 그 책을 골라집었고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을 보고 이 정도면 읽어볼 만하겠다 싶었던 듯하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본 세계는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세상 그 너머의 것이었다. 꽤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그 책 한 권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적나라하게 가른 느낌. 그리고 모르는 세상에 훨씬 크다는 놀라움이었다. 균열은 작은 데서 온다.
2. 책 안의 책 읽기를 통해 관심사의 영역을 알아차리고 좁혀나가는 감각을 키웠다.
거기서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장 지글러의 책을 읽다가 조금 더 관심이 생기는 내용이 나오거나, 책에서 인용한 다른 책의 내용이 흥미로워 보이면 그 책으로 건너갔다. 그렇게 책에서 다른 책으로 건너갈수록 기아, 질병, 부패 등을 포함하는 '세상의 빈곤'이라는 크고 넓은 문제에서 '기업이 개발도상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이라는 조금은 더 좁혀진 영역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었다. 긍정적, 그리고 부정적이라는 양면성을 모두 이해하고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의 관심사는 조금 더 뾰족해졌다.
3. 전문가들이 모인 곳으로 찾아갔더니 모르는 걸 알아갈 수 있었다.
어디에 가면 내 관심사를 업으로 할 수 있을까? 그때부터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 댔다. 지금은 '국제개발협력'분야가 꽤 알려져 대학생 중에서도 이 분야, 특히,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제대학원 중에서도 '국제개발협력' 전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여러 곳이고, 우리나라 공적개발원조(ODA)도 증가하고 있고 이 분야에 종사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15년 전쯤에 이 분야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내가 '국제개발'분야에서 일한다고 할 때마다 나는 '국제개발'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만 했다.
나 역시 검색에 검색을 이어가던 중 이 일을 업으로 하려면 '국제개발'이라는 키워드를 알아야 한다는 것도 한참 후에나 알 수 있었다. '국제개발'이라는 키워드를 한글로 검색하던 중, ODA Watch라는 비영리조직에서 몇 주 동안 워크숍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정보를 발견했다. 정보의 희귀 속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소식이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바로 등록하고 수강료까지 입금했다.
워크숍은 일주일에 두 번,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이화여대 강의실에서 열렸다. 국제개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교수님과 활동가분들로 구성된 귀중한 라인업이었다. 6시에 광화문에서 회사를 칼퇴하고 서둘러 가야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저녁을 거르고 가야 했지만 1분이라도 늦을 세라 서둘러 가는 길이 신이 났었다. 강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마음이 설렜다. 내가 모르던 세상을 한 주 한 주 워크숍이 진행될 때마다 알아가고 있다는 게 좋았다.
4.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동료를 찾아서 그룹 스터디에 참여했다.
국제개발이라는 분야에 대한 내 관심사는 이미 점점 커지고 있었다. 워크숍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또 열심히 검색을 했고 다음 카페에서 '개발학스터디'라는 모임을 발견했다. 거기에서는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6~7명 정도를 모아 그룹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내가 가입한 시점에 한 그룹이 스터디 모임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래서 역시 망설임 없이 바로 함께 하고 싶다는 댓글을 남겼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내가 적극적이고 사회성도 활발한 사람이라고 상상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실 내향인이다.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언가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찾은 것도 그래서 적극적으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간 것도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은 사실 자체도 내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오프라인으로 다 같이 만난 첫날의 그 어색함이 지금도 기억난다. 매주 토요일 오전 민들레영토(지금도 있으려나)에서 만나서 2시간씩 국제개발 분야에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우리는 이내 가까워졌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이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직장인이었고, 전혀 다른 일을 하다가 국제개발이라는 영역에 관심의 발을 들여놓게 된 사람들이었다. 비슷한 나이에,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 반갑고 소중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 중 일부는 내가 생각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친구이고 국제개발을 업으로 하는 동료이다. 함께 고민과 경험을 공유하고 도와가며 서로의 성장을 지지한다. 단지 지식을 얻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그 스터디모임은 내게 좋은 동료를 주었다.
사실 열거한 네 가지의 방법은 전혀 특별한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책 한 권을 읽고 삶이 변화했다는 얘기들은 많이 들어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서는, 그 일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내비게이션 하겠다는 마음이다. 이러한 사소한 방법들이 모이고 실행되어야 나침반도 마침내 방향을 가리켜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