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도록 만드는 요소
24년이 봄을 지나 여름의 문턱 앞에 왔다.
‘아트러너를 찾습니다’ 현수막 문구를 본 게 3월 초, 어느덧 3개월이 흘렀다.
그 시간은 계절도 바꿔놓았고, 나도 바꿔놓았다.
이번 에피소드는 어둠 속에 잠들어있던 재료들이 빛을 보게 된 그 이야기이다.
만들기와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아니면, 무엇과도 금방 사랑에 빠지는 나 같은 사람이 겪는 일이다.
재밌어 보이는 그리기나 만들기를 발견하면 덮어놓고 재료부터 사고 본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비싼 재료만 아니라면 더 쉽게 구매한다. 재료만 있다면 뚝딱 그리고, 뚝딱 만들 것 같았는데 막상 뜻대로 되지 않는다. 기대했던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니 실망감은 커지고, 결국 재료는 버리지도 못하고, 서랍 깊숙이에 자리 잡는다.
오일파스텔이 그런 존재였다.
우연히 크레용토끼(@crayon.rabbit)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다가 오일파스텔로 그린 그림에 빠졌다. 부드러운 색연필 그림과는 다르게 거칠고, 투박한 질감의 그림이 색다르게 느껴졌고, 재료만 있으면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화방넷에 접속해서 까렌디쉬 오일파스텔 24색을 구매했다. 수시로 배송진행상태를 새로고침하며,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이틀 후 오일파스텔이 내 손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기에 24색을 살 것인가, 48색, 96색을 살 것인가를 고민했던 시간보다도 더 짧게 잠시 잠깐 오일파스텔을 끄적였던 것 같다. 호기롭게 덜컥 샀지만 재료의 사용법도 배우지 않은 터라 마음처럼 그려질 리 없었다. 이상하게 그려지는 것도 참기 어려웠지만, 손바닥 반만 한 노란 토끼를 그렸을 뿐인데, 노란색 오일파스텔은 많이도 닳았다. 이런저런 핑계로 책상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진 오일파스텔 상자는 서랍 속으로 들어가는 운명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집안 구석구석 서랍 속을 모두 열어보았다. 작은방 서랍장, 책장, 거실장 곳곳에 흩어져있던 미술재료들을 거실 한가운데 꺼내놓았다. 72색 프리즈마 유성색연필 상자도 찾았고, 24색 까렌디쉬 오일파스텔도 찾았다. 수채물감을 채운 미니팔레트와 붓도 찾았고, 사놓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수성크레용 12색도 찾았다. 이것들을 언제 샀더라? 갑자기 궁금해서 과거 구매내역을 찾아보았다. 2019년 10월이라니…4년 전이라니…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잠들어있던 재료들을 보고 있으니, 여러 가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오랫동안 손그림을 그리지 않았구나’, ‘이 중에서 능숙하게 연습했던 재료는 색연필밖에 없네’, ‘한꺼번에 있는 재료를 다 꺼내놓고 보니 재료 부자였구나’ 싶었다. 그 와중에 수성크레용은 사용법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완전히 까먹은 탓에 사용법을 검색해 보았다. 팔레트에 수성크레용을 묻히고, 물을 섞어 사용하는 재료였다.
‘이건 사용법도 모르고 사기만 했었네’, ‘이제부터 열심히 활용해 보겠어’
거실에 있는 책장 두 칸을 비운 후 언제든 꺼내기 쉽게 재료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종이와 오일파스텔을 꺼내 당장 사용할 수 있도록 책상 위에 펼쳐두었다.
아트러너 사전 워크숍은 일주일에 단 하루, 목요일 뿐이었다. 그 하루는 나머지 요일 모두를 예술로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한번 생각나게 했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볼까?’ 다음에는 수시로 해보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색연필 인물화 진짜 많이 그렸었는데… 지금도 할 수 있으려나? 맞다. 수채화물감이랑 오일파스텔도 어디 있을 텐데…‘그리고 마지막에는 종이와 오일파스텔을 꺼내어 무엇이라도 그리게 해 주었다. 아트러너 활동을 위한 사전 워크숍이 짧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의 일상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나 보다.
예술 관련 강연, ‘점, 선, 면, 드로잉‘ 실습과 과제 수행, 용인시 거리축제의 예술활동 부스 기획과 참여, 이런 단편적인 시간들은 물 위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여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