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받은 그림 작업의 신비로움
“안녕하세요. 인스타그램에 남겨주신 핸드폰 번호를 보고 전화드려요”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먼저 한다는 것이 오랜만인 탓에 낯설고, 어색했지만, 힘껏 밝고 명랑한 목소리 톤을 유지하며 인사를 건넸다.
“네,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림 부탁하려고 댓글을 남겼어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친절한 차분함과 여유로움 덕분에 긴장해서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목소리로 보아 80대 정도의 할머니 같았다. 반나절 고민할 때 그분의 인스타그램 속 사진을 살펴보았는데, 한국화 그림과 할아버지, 어린아이들의 사진들이 많이 당연히 할아버지일 꺼라 생각해서 더 긴장했는데, 할머니 목소리를 들으니 더 편하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림을 하나 하고 싶은데, 즐겁게 다녀왔던 여행사진이 있거든요. 그것으로요. 그리고 영정사진으로도 쓸 수 있게 내 얼굴을 그려주었으면 해요. A4용지 두배 정도 크기는 되어야 할 것 같고요.”
받고 싶어 하는 그림의 방향이 명확하셨기에 이야기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인스타 그림에서 제 그림을 보셨듯이, 사진과 똑같이 그리는 사실화가 아니고 저만의 그림체가 있는데, 영정사진으로 어울릴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림 크기도 주로 A5정도를 주로 그렸기에 현재 작은 종이밖에는 없어요. 제 그림체 그대로 그려져도 괜찮으시겠어요? “
사실화가 아닌 베이지톤의 일러스트 스타일의 그림체가 영정사진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고, A3 크기 그림은 3년 전에 그려본 게 다였기에 두서없는 이야기가 툭 튀어나왔다.
“그럼요. 그림체가 좋아서 부탁하는 건데요. 평소에는 방에 걸어둘 거고, 영정사진으로 써도 좋겠다는 거예요”
좋아서 그린 그림이었다.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좋아하는 톤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그려 작업실인 나의 방에 가득 채운 것뿐이었다. 베이지톤 색들로 그려진 따뜻하고 포근한 나의 그림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고, 잘 그려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그림을 방에 걸고, 소중히 대해준다고 상상하니, 눈시울이 촉촉해지고, 가슴속에는 뜨겁고,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네, 그럼 원하시는 사진을 문자로 보내주세요. 그리고 언제쯤 받기 원하세요? 그림 사이즈가 낯설어서 언제까지 가능하다 확답을 드리기 어려워서요.
“저는 시간은 충분해요. 언제라도 좋으니 진행해주고, 비용도 알려줘요”
“네. 종이 구매 등 여러 가지 검토 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처음 받은 그림 의뢰, 그러기에 또 처음인 의뢰자와의 전화통화. 전화하기 전만 해도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부딪쳐보니 희미하게나마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로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떠올랐고, 통화가 끝난 후 당장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가 머릿속으로 좌르륵 목록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비용을 말씀드려야 그림 진행을 최종 결정하실 수 있기에 포털사이트에서 “초상화”를 검색해 비슷한 스타일의 그림과 사이즈를 비교하여 7만 원으로 산정 후 다시 문자를 드렸다. 그림 진행을 부탁한다는 답장이 바로 왔다. 그리고 비용은 그림을 받은 후 만족하면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던 사이즈가 아니어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혹시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림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완벽주의자 성향인 내가 그림을 보냈다는 건 스스로도 만족했다는 뜻이고 의뢰자가 비용 송금을 했다는 것은 그 무엇의 작은 개입도 없이 그림이 마음에 든 이유일 것이므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혹시나 비용을 받지 못한대도 늘 즐겨하는 그림 그리는 작업을 했다 생각하면 될 것이었다.
그녀는 유럽여행 중 찍은 전신사진 한 장을 보내주었다. 성당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 브라운색 웨이브 짧은 커트 머리에 가족 재킷과 스카프를 매고, 진한 검정 선글라스를 낀 전신사진이었다. 선글라스 낀 사진을 영정사진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까 싶어 다른 사진이 없는지 물었는데, 더 이상은 없다고 했다. 살짝 걸리긴 했지만 더 이상의 사진이 없다니 딱히 방법이 없어 그 사진으로 진행해 보기로 했다. 당장 A3 사이즈의 캔퍼스를 주문을 해야 했다. 생각해보니 인물화의 필수 색인 PC939 peach와 PC991 beige의 피부톤 색연필들이 모두 몽당연필로만 남아있다는 게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담을 액자도 작은 것 밖에 없어 A3 액자도 필요했다. 그녀와의 첫 전화통화를 끝내자마자 주문을 했는데, 2시간 후 전화가 한통 왔다. 프리즈마 색연필의 경우 코로나로 인해 수입이 지연되고 있어 품절이며, 언제 입고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물화인데 피부색 색연필이 없다니 정말 낭패였다. 인터넷 화방 다른 여러 곳에 전화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근처 오프라인 매장에 전화하니 가장 비슷한 색인 PC1001을 알려주어 바로 달려갔다. 구매하려고 보니 PC1001 옆칸에 그토록 찾던 PC939 색연필이 샘플이라는 스티커로 돌돌 감긴 채 한동안 샘플로 사용되어 조금 짧아진 상태로 놓여있었다.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 색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설명하니 10%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제야 의뢰받은 작업을 시작조차 못할까 봐 걱정되던 마음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재료 준비를 하루 만에 끝내고, 작은 그림에 필요 없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나무 이젤을 꺼냈다. 어제 주문해 방금 도착한 A3 파브리아노 뉴아띠스띠꼬 수채화 용지 스케치북을 올렸다. 평소라면 사진을 고르고, 드라마를 보며, 편한 자세로 작업을 시작했겠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달랐다. 작업실로 사용하는 내 방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미대 입시 실기시험을 보는 것처럼 손이 떨리고, 심장은 두근거리고, 숨이 차올랐다.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고,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하고, 새하얀 캔퍼스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든지 지워지는 연한 연필을 손에 쥐고 있는데 쉽사리 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어깨와 손목을 꽉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같았다. 미리 비용을 안 받았는데 이 정도로 긴장되다니, 받았으면 아주 큰일이라도 날뻔했다. 요즘 즐겨먹는 로열 밀크티를 만들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잘 안되더라도 ‘죄송합니다. 다른 작가에게 초상화를 부탁해주세요.’ 하고 말지 뭐, 생계유지를 위해 그리는 그림이 아니잖아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마감일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그려 낼 수 있을까? 하는 조급함이 아들을 재우고 11시쯤 작업실로 이끌었다. 잠이 올리 없었다. HB 연필로 연하게 형태를 잡아놓고, PC1050 grey10% 색으로 스케치와 명암을 칠하니 새벽 2시가 되었다. 완성을 위한 첫 단계를 무사히 통과했다 안도하며, 벅찬 기분으로 늦은 잠을 청했다. 다음날 너무 이른 시간을 피해 오전 10시쯤 스케치한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문자로 보냈다. 마음에 든다는 말과 함께 얼굴을 갸름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셨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다 좋은 소식을 들은 듯 기뻐하며, 채색 단계로 들어갔다. 나에게는 PC939 샘플 색연필이 있었기에. 채색부터는 늘 즐겁게 그리던 대로 하면 되었다. 평소 그리던 그림보다 4배의 크기이니, 4~6배의 수고가 더 들뿐이었다. 막연하거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거나 하는 것은 없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색을 쌓아가며 채색하기 시작했다. 밝은 색으로 표현하는 채색 1단계를 끝내니 6시간이 흘러있었다. 화장실 가는 것을 제외하고 꼼짝도 않고 그렸다. 그림에서 멀리 떨어져 지켜보니 나만의 그림체로 따뜻하고, 포근하게 그려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내 마음에는 쏙 들었기에 그리면 그릴수록 신이 났다.
자신 있게 지금까지 그려진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 문자로 보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좋은데 선글라스 안쪽을 조금 밝게 표현해 주었으면 하셨다. 색연필의 경우 지워도 흔적이 남기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기에 살살 지워가며 밝은 색으로 다시 표현하였고, 이번에는 괜찮다고 하셔서 진한 색으로 표현하는 2차 채색작업을 시작했다. 잠을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고 3일 동안 12시간 정도를 즐겁게 몰입한 끝에 A3 크기의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나의 그림 스타일대로, 떠나보내기 싫을 만큼 마음에 들게 그려졌다. 이번 그림의 완성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목적 있는 그림을 그리며 부담감을 이겨냈다는 것이고, 작은 그림뿐 아니라 큰 그림이라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는 것이며, 취미가 아닌 전업작가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나의 두 번째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는 어떤 이정표를 찾은 느낌이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만든 두려움 터널을 지나, 이게 터널의 끝이 아닐까 느껴지는 정면의 조그마한 노란 불빛을 발견하고 있는 힘껏 달려 마침내 터널을 빠져나와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을 맞이한 것처럼 말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