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림에 심장이 멈추면 어쩌지
나를 그려줄 수 있나요? 비용은 지불할게요. 전화해 줄래요?
21년 4월의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 올린 나의 그림에 달린 댓글이다.
인물화 그리기를 즐겨한 지 3년쯤 되었다. 3~4시간 정도 소요되는 인물화 그리기의 시작은 마음에 쏙 드는 사진을 고르는 것이다. 사진 속 인물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만 매력적인 인물화가 완성된다. 늘 그리고픈 아들의 사진이라도 구도, 빛, 표정 등 마음에 드는 사진 고르기는 오히려 더 까다롭다. 오랫동안 고심하고, 짐작하며 고른 사진으로 꼼짝도 않고 4시간 동안 그렸고, 원하는 분위기로 그려져 벅찬 마음으로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댓글이 달린 것이다.
온전히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중한 그림들을 모아두자는 단순한 의도로 2018년 4월부터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저장소 역할로만 사용했기에 특별한 문구 없이 애정이 잔뜩 쌓인 그림을 정성껏 찍은 후 실물과 가장 흡사한 사진을 올려왔다. 팔로워나 팔로우가 같은 뜻이라 생각할 만큼 다른 기능에는 관심조차 없어 그림을 업로드할 때만 가끔 들어가곤 했는데 어느 날, 기적처럼 그 댓글을 만났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고, 완전히 바꿔놓았다.
댓글을 보자마자 잠시 숨이 쉬어지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니터 화면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이 점점 사라지더니 그 운명적인 댓글만이 한 글자 한 글자 춤추듯 아른거리며 선명하게 드러나 둥실 떠올랐다. 혹시 달콤한 꿈을 꾸고 깼을 때 실제라고 느끼는 회상 몽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혹시 초등학생의 장난 아닐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텐데 기대하지 말까? 작가도 아니고, 미술 전공도 안 했는데, 단지 그리는 게 즐거워서, 좋아서 그리는 것뿐인데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림 의뢰를 한다고? 수만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리 없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기에 잊어버리자는 마음으로 반나절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진짜 그림 의뢰인데, 스스로를 믿지 못해 이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크게 후회하며, 자신을 원망하는 모습이 상상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나도 모르게 “메일이나 카톡으로 연락 주세요.”라고 댓글을 남겼다. 그러자 핸드폰 번호가 적힌 댓글이 바로 달렸다. 이번에는 고민할 틈도 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그림 의뢰를 받게 되었다.
42세, 어느새 중년, 더 이상 설레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셀레고, 숨이 가쁘고, 심장이 두근거려 멈추면 어쩌지 하는 우스운 걱정이 들 만큼 설렘 가득한 한 달을 보냈다. 지금 이 그림을 누군가 원하고 있고, 간직할 거라 생각하니 선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근심 걱정과 완성도 있게 그려졌으면 하는 기대의 중압감이 들었지만 의뢰받은 작가만의 특권이라는 생각에 너무 행복하고, 끊임없이 엷은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그리고, 글쓰기라고는 Monthly Diary 한 칸을 채우기도 벅찬 나였는데, 요즘 일어나는 마법 같은 일들을 에세이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마음을 휩쌌다. 이 설렘을 놓치기 전에, 소중한 이 느낌들이 달아나기 전에 실패 경험 투성이 초라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로 세상에서 인정받았다고 소리치고 싶었다.노트북을 열고, 고민할 틈도 없이 설렘의 문장들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평소 10시쯤 잠에 취하는 내가 새벽까지 졸리지 않았고, 맛집 가기가 취미인 내가 허기도 느끼지 못한 채 6시간을 몰입해 글을 써나갔다. 한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이 머릿속 팝콘 기계에서 옥수수 한 톨 한 톨이 팝콘으로 변하듯 이야기로 변해 팡팡 튀어 올랐다.
그렇게 세상에 소리치고 싶은 간절한 기대는 또다시 새로운 길로 나를 안내했다. 글을 쓰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우연히 들어간 웹사이트에서 카카오의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를 알게 된 것이다. 작가 신청 절차를 통과한 사용자만 글을 발행할 수 있기에 블로그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제 셀렘은 나와는 별개의 이야기라고, 뜨거운 열정은 잊은 지 오래라는 나와 같은 중년도 다시 셀렘을 찾을 수 있다고, 브런치에서 소리치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시작한 브런치 작가 준비과정이었다. 그런데 초고를 쓰고, 여러 번의 퇴고 과정을 거치다 보니 오히려 나조차 이해 못하던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고 있다.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은데 왜 좋아하는지, 잘 그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지, 사람을 만나면 늘 상처 받고, 가끔 힘들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까닭은 무엇인지, 타인을 향한 이해와 온전한 공감이 어려운 이유 같은 것 들 말이다. 실패 경험 투성에,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는 초라한 내가 그림으로 인정받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정신없이 글을 쓰다 보니 조금씩 나도 모르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글쓰기의 힘인 것을, 마법인 것을, 기적이라 믿으며, 글쓰기가 주는 선물을 반갑게 맞이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