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훅 들어와 나가지 않는 것이 글감이라면, 이미 충분하다.
집안에서 까지 왜 이어폰을 끼고 있어? 나랑 대화하기 싫은 거야?
2000년 7월 29일 그를 처음 만났다. 23살이 되던 해였다. 다툼 한번 없이 5년을 함께한 후 2005년에 결혼을 했다. 2021년이 되었으니 그를 알기 전과 후 살아온 시간의 절대적인 양이 같아져 간다. 아니다. 영유아기를 제외하면 더 많아진 셈이다. 감정의 기복 없이 늘 한결같이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의 남편이 평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톤으로 말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화장실 가는 것보다 먼저 이어폰을 찾는다. 잠들어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어폰이 몸의 일부인양 함께한다. 그렇긴 해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한쪽만 사용하려 노력한다. 그날은 집안일을 하느라 식기세척기를 돌렸고,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면서, 분주히 저녁 준비를 하느라 시끌시끌했기에 나도 모르게 양쪽 이어폰을 모두 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남편이 건넨 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늘 나를 먼저 생각해 주고, 이해해주는 남편이 톤을 높였다는 것은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이럴 때는 즉각적인 사과가 필요하다. 사과가 없다면 당장 다툼이 시작될 것이 확실하기에 “정말 미안”이라고 말하고, 이어폰을 뺐다.
나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에 무언가를 듣는다. 기분이 좋을 때는 신나는 음악, 심심하거나 우울할 때는 유쾌한 팝캐스트, 아침식사를 준비할 때는 전날 뉴스룸 파일을 듣는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렇게 지낸 지 10년은 넘은 것 같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 속에서 MP3 플레이어의 유선 이어폰이 휴대전화의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변했을 뿐이다. 아마도 불유쾌한 생각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강박 사고 증상 때문이었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강박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불쾌한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장치가 된다. 이를테면 샤워하러 들어간 욕실의 세면대를 보고 작년까지 살던 전셋집 이사 나가던 날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집의 세면기와 그 전셋집의 세면대가 같은 모양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사 나가던 날 신경쇠약에 걸린 듯 극도의 예민함으로 집 상태를 점검하던 여주인의 까탈스러운 표정과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던 나에게 퍼부었던 무례한 말들이 토씨 하나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고작 2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인데 녹화된 동영상을 재생하듯 그날의 장면과 대화, 주위의 소음, 온도, 감정까지 그대로 되살아 난다.
스스로 선택한 소리를 머릿속에 욱여넣어야만 그 녀석들이 떠오르지 않게 되고, 드디어 사라졌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소리라는 더 강력한 녀석에게 밀렸을 뿐 뒤에 숨어 그 크기 그대로 숨죽이고 있었다. 살아내야겠기에 찾았던 방법이었는데, 늘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좀 이상하긴 하지, 그래도 이게 마음이 편한데 어쩌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뿐, 바꿔보자는 생각은 못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잘 참아준 남편의 핀잔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수히 많은 장면과 상황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는데, 가슴에 훅 들어와 나가지 않고, 남아있는 말이 있다면, 내 안에 풀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2회 ‘글감은 어떻게 고르는 것일까요’ 중에서
음악이나 뉴스 듣기가 재미없어지면 오디오 클립(audio clip)을 듣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채널은 제목을 보자마자 듣기 시작했다. 유튜브 ‘유시민의 알릴레오 26회 글쓰기 고액과외, 무료로 해드립니다’ 편에 출연한 은유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같은 사람도 글이라는 것을 쓸 수 있을까? 모자라고, 부족한 경험과 생각을 누군가 좋아할까? 그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에서 최근에 글쓰기를 시작했고, 고3 때 취업에 유리한 소프트웨어 학과를 최종 선택하긴 했지만, 문예창작과도 지원했을 만큼 늘 곁에 두고, 잘했으면 하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특별한 의미 없이 욱여넣을 소리가 필요해 습관처럼 들었을 뿐이었는데 고작 20분 만에 평생 풀고 싶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몰랐던, 그래서 많은 시간을 낭비했고, 스스로를 괴롭히며 아프게 했던 평생의 문제를 풀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언제고 불쑥 나타나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야 마는 그 녀석들, 수십 개의 불쾌한 생각들은 풀어야 할 문제였음을 알게 되니, 이미 정답을 찾아 어두운 지하동굴을 빠져나온 것 같았다.
가슴에 훅 들어와 나가지 못하는 수많은 불안한 생각들이 소중한 남편과 아들 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무언가를 듣는 동안은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 녀석들이 사라졌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 욱여넣은 소리의 강력함에 밀려 뒤로 물러나 있었을 뿐 언제고 다시 나타나 괴롭히려고 기회만 노릴 뿐이었다. 피해 다녔던 그 녀석들을 강제로 끌어내어, 왜 나가지 않고 남아있을까 수십 번 묻겠다. 반복해 사유하며, 글로 풀어써 볼 것이다. 언젠가 녀석의 크기가 작아져서 사라질 거라 기대하며, 한쪽에만 꽂혀있는 이어폰과 이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