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받은 그림 작업의 신비로움
나만의 그림체 그대로 그려졌다 생각했기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실물과 가장 비슷하게 찍힌 사진을 골라 문자로 보냈다. "생각한 그대로 잘 그려졌군요. 바로 보내줄래요? 어서 실물을 받아 보고 싶어요.” 하는 답장을 기대했다. 하지만 답장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문자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핸드폰만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지쳐갔다. 6시간쯤 흐른 뒤 드디어 답장이 왔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닮았지만, 선글라스 안쪽 표현이 어색하고, 특히 눈이 닮지 않다고 했다. 그림의 대상이 되는 원본 사진 속 그녀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려 노력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경 쓰지 않은 다른 선명한 사진이 있다면, 참고하여 선글라스 안쪽을 다시 그려보겠다고 답했다. 3시간 후 받은 사진 조차 멀리서 전신을 찍은 사진이었다. 아무리 확대해도 눈의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까만 선글라스 속의 감춰진 눈보다 아주 조금은 나았기에 멀리서도 관찰해 보고, 실눈으로 희미하게도 봤지만 답답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도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의 노력을 더해 수정하여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이후로도 그녀는 선글라스 안쪽을 어둡게 표현해 달라, 눈을 조금 더 크게 수정해 달라, 남편에게 보여주었는데 당신 같지 않다 말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럴 때마다 살살 지우개질을 한 후 수정해서 보냈지만,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지우개질이 계속될수록 종이가 상해갔기에 더 이상의 수정은 어려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 답장은 없었다. 다음날 내가 먼저 이쯤에서 마무리하겠다고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계속해서 문자를 기다릴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 단념할 수 있게 완벽히 포기하도록 하는 장치 같은 것이었다. 결국 수고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이 이야기는 끝이 났다. 주인과 눈 맞춤 한번 하지 못한 그녀의 초상화는 작업실 서랍 깊숙이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버려졌다.
다음 일주일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으로 지냈다. 어렴풋이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그 일 때문이겠지 싶다가도,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었다. 엄청나게 슬픈 일이 일어난 듯 우울하다가, 뭔가 행운을 발견한 듯 설레고, 즐겁지만 온전히 즐길 수는 없는 기분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바라던 뭔가를 이룬 듯 성취감이 느껴지지만, 결승지점에 도착한 육상선수가 결승선 테이프는 끊지 않은 개운하지 않은 기분도 들었다. 처음으로 그림 의뢰를 받고, 준비하고, 그리면서 매일 설레고, 들떠있던 과정을 모두 지켜본 아들과 남편이 그녀에게 다시 연락이 왔는지 물었지만, 그 일을 생각하면 이유 없이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져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2주가 지나자 비로소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대상 사진은 선명하고, 고화질로 받아야지(선글라스 낀 사진은 X), 의뢰자가 원하는 그림을 명확히 알기 위해 많이 묻고, 소통해야지, 그림 제작 과정을 더 많이 공유하여 확인받아야지, 마지막으로 그리는 수고에 대한 대가는 미리 받아야지 하는 것들 말이다. 자신이 실제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신의 얼굴을 사진도 아닌 그림으로 받아 만족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녹음한 목소리를 다시 들으면 스스로가 아닌 것으로 느껴지듯이 거울이나, 사진 속 반전된 스스로의 얼굴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달쯤 시간이 흘렀고, 이제 그 이야기를 꺼내도 마음이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완벽하게 일상을 되찾게 되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사소한 댓글 하나였겠지만, 나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동기가 되었고,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작가라 불러주고, 나의 그림을 작품으로 인정해준다는 벅찬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대신해보니까 되네 하는 성공 경험을 몸으로 체감하여 알게 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것은 어느 누구도, 어느 곳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정말 신비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한 번이지만 취미 그림과는 달리 의뢰받은 그림 작업은 강요하지 않아도 진정한 몰입 속에서 작업하게 된다는 것과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강한 열망은 현재 스스로의 능력을 넘어 잠들어있던 능력까지 깨어나게 하는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오늘 작업실 서랍 깊숙이 외롭게 버려져있던 그녀의 초상화를 꺼냈다. 그리고 한 달 전 미리 준비한 흰색 프레임 액자의 유리 사이에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그림을 끼어 넣었다. 그리고는 포장 에어캡으로 액자 주위를 여러 번 두른 후 선물용 상자에 넣고, 위쪽에 그녀의 주소를 정성스레 적었다. 내일은 우체국으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