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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앨 May 12. 2022

뭘 "잘 부탁드려요"?

네덜란드에서 초보운전으로 살기

누구나 그러듯이 대학교 입학 때 즈음 속성으로 딴 운전면허. 따자마자 장롱면허가 되었더랬죠. 그리고 네덜란드에 오래 살게 되면서 네덜란드 운전면허로 전환한 게 10년 전이에요.


거의 만기가 다가오는 운전면허를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요. 암스테르담에서 근교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졌어요. 집에서 회사 도착하기까지 1시간. 기차역에 가는 시간, 갈아타면서 기다리는 시간, (가끔 내 역을 놓쳐서 거꾸로 가는 시간) 모두 합치니 그렇더군요. 그런데 차로 가면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운전을, 평생 미룰 것 같았던 운전대 잡는 일을 드디어 하게 되었어요. 한국 운전면허증은 별다른 절차 없이 한 60유로 정도로 네덜란드 면허증으로 바꾸어주거든요. 제가 있는 동안 절차가 더 좋아져서 한국 면허증도 돌려받았어요. 그런데 어떤 나라 (사실 대부분의 나라)의 국민들은 이런 혜택이 없어서 네덜란드에서 운전을 하려면 필기, 실기, 연수까지 과정을 밟아 통과해야 한다네요. 그리고 그게 한 5000유로는 든대요.


어찌되었든, 어떻게 운전하는 지도 가물가물했지만 일단 연수를 받기로 했어요. 첫 번째 실험 연수는 제가 연수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가늠하는 단계인데요, 선생님이 "차를 다루는 것은 적절하게 할 수 있지만 교통법 준수와 예의 주시하여 운전하지 않음. 도로에서 위험요인이 됨. 이대로 운전하는 것은 부적절함. 90분씩 10번 제안"을 해주시더라고요.ㅋㅋ 사실 차를 다루는 것도 부적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그건 어렵지 않았나봐요.


그래서 10번의 연수를 채우고, 장거리, 단거리, 회사 출퇴근까지 요새는 차를 몰고 많이 다니고 있네요. 벌써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유턴하다가 나무에 들이받아서 차를 긁은 걸 빼면 (흑...) 사고 없이 안전 운전하고 있어요. 그래도 아직 많이 긴장하고 조심해서 운전하게 되지요.


어느 날은 차 뒷 유리에 "초보운전" 딱지를 붙이면 어떨까 싶어서 남편한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 남편이 "왜?"라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전... '내가 초보라고 알리면 다들 예의 주시하지 않을까? 내 주변을 조심해서 운전하지 않을까? 내가 실수해도 좀 아량 있게 넘어가 주지 않을까?' 싶다고 했죠. 그렇게 말하는 와 중에 감이 오더군요. 그리고 남편이 한 말은 제 맘에 떠오른 말하고 같았어요. "그런 건 네가 알아서 조심해야지."

이런 스티커 너무 재밌어서 해보고 싶었는데 .... ㅎㅎ

그래도 한 번 더 남편한테 이야기했어요. "한국에서는 초보운전 딱지 붙이고 다니는데... 그게 '잘 부탁합니다'라는 의미거든".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 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 뭘 잘 부탁한다는 거지?....'


그리고 남편의 확인 - "그건 한국에서 통하는 거구".


그러고 보니 신기하더라구요. 우리가 흔히 인사말로 하는 "잘 부탁드려요"가 얼마나 우리 정서에서 우러나온 말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영어나 네덜란드어로 번역도 좀 불가능한 것 같지요? 특히 선물과 함께 "잘 부탁드려요"하는 건, 정말 이상하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랄까, 합리주의 사회다 보니, 개인이 잘하면 잘하는 거고, 다른 사람이 그 인정해주는 것을 부탁받아할 일은 아닌 거가 되지요. 예를 들어 회사를 시작하는 날 '잘 부탁한다'는 건, 개인의 능력에 대한 부정이자, 타인의 인정에 대한 이유 없는 과도한 기대, 그리고 그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걸 함의한 것처럼 들릴 수 있겠다 싶어요.  

이런 비디오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길래 공유해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5XnAIsTTn8

차를 운전하는 것도, 내 앞길 조심하고, 다른 사람도 자기 앞길 조심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초보니 좀  봐주세요, 조심해주세요' 하는 건 타인에 대한 기대이자 불합리한 요구처럼 들릴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알아서 (독립적으로), 잘 (자신감 있게) 해야지, 다른 사람의 양해를 구할 일은 아니지요.


각자의 인생인 걸 내 앞길이나 잘 챙기자... 누가 날 더 봐줄 거라 생각하지 말자~ 이런 가치관이 초보운적 딱지에 대한 대화에서 느껴졌네요.


합리주의는 얄짤이 없는 걸까요, 공평한 걸까요? 우리나라의 표현이 종종 영어로 번역하기가 힘든 것도 문화차이에 있는 것 같지요. 그리고 그 의미가 우리 사이에서도 애매모호하기 때문인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좋은 게 좋은 거'는 피차간 유리하면 당첨인 걸까요? 아니면 상관없다는 의미인 걸까요? 서양의 '니거 내거' 문화화 논리 중심의 사고를 반영한다면 '좋은 게' 정말 '좋은 걸'까요?


운전연수를 받을 때에도 진절머리 날 정도로 합리적인 네덜란드 교통법규에 대해 잘 알게 되었어요. 남편이 도로 위 '우선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아 그냥 상식에 맞춰 양보하면 되는 걸 왜 우선권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냐'고 했는데, 선생님도 엄청 '우선권'에 대해 강조하더라구요. ㅎㅎ 역시 뭐라도 경험이 더 많은 사람이 잘 아나 봐요.(그리고 운전은 가족보다는 전문가에게 배워야하구요...) 사거리나, 로터리, 자전거 도로와 맞닿는 도로가 많다 보니, 특히나 더 누가 먼저 출발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 규칙이 정확해요. 그리고 모든 상황에 대비한 규칙들이 있더라고요.


이 규칙을 다 알고, 연습하고, 거기에 면허시험 보기 전 연수 시간도 (고속도로 연수 포함) 최소 30시간이라니, 네덜란드 도로에 나오는 사람들은 '초보'가 아니구나 싶네요. 그래서 '김여사'도 드문 것 같긴 해요!

실은 자동차 모는 '김여사' 보다 자전거 모는 '김여사'가 많죠. 자전거 무법지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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