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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jeong Oct 07. 2022

나를 만나러 가는 길

풀을 뽑다가

잔디는 서로 응원하며 어깨동무하듯 함께 어우러져 쭉쭉 뻗어나간다. 콘크리트나 도로 위에서도 잘 뻗어서 건너편 흙이 있는 곳까지 뻗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람이나 차들이 방해하지 않는다면) 가다가 가다가 길이 막히면 위로 잘 자란다.


풀은 저 혼자 위로 위로 잘 자란다. 풀의 그림자에 해를 들이지 못하는 잔디는 누렇게 아프다.

비가 온 다음 날  풀뿌리가 물을 저장하려 땅 문을 헐겁게 열어 놓는다. 그때 풀을 뽑으면 뿌리째 잘 뽑힌다.

누렇게 아프던 잔디들이 하나씩 하나씩 태양을 향해 새싹을 밀어낸다.


가녀린 토끼풀은 가녀린 줄기로 잔디의 몸도 감으며 잔디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가 영토를 장악한 다음 위로 자라서 잔디를 덮는다. 토끼풀만 제거하는 약을 살포할 수밖에 없다. 물과 약을 섞어 물처럼 속임수를 뒤집어쓴 약물을 뿌린다. 잔디를 잡고 있던 토끼풀이 눕는다. 내 마음도 따라 눕는다. 다음 생에는 넓은 들판이나 산에서 피어나길 바라본다.

토끼풀 밑에 있던 잔디들은 파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밀어낸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상대를 늘 응원하는 사람, 양보를 잘하는 사람, 한 발 물러 설 줄 아는 사람, 잔디를 닮은 사람이 있다.

나의 성격이랄까 성향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주는 쪽을 더 선호한다. 기부건 물건이건 마음이라도 주는 순간 받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나를 만날 때 소소한 행복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호주에는 한글책 구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친구들이 가끔 책을 보낸다. 책을 선물 받으면 정말 기분 좋다.

신난다.

고맙다.


그런데 딱히 표현하기 애매한 감정이 늦가을 물가의 물안개처럼 스며든다. 그리고 고마움과 불편함이 반반씩 섞인 감정이 마음 안에서 양쪽으로 기둥을 세운다.

불편함이라는 단어가 어색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기둥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글에선가 사랑은 주는 것보다 받는 일이, 더 어렵다고 표현한 어느 작가님 글이 생각났다. 하늘거리는 핑크빛 스카프를 두른 고마움 속에 숨어 있는 불편함.

그렇다 익숙하지 않은 고마움이다. 경험이 많지 않은 감정이다.  




남편의 사랑은 어느덧 익숙함으로 스며들어 당연함이 되었고 그 사랑과 관심만 나에게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경고성 빨간 램프가 깜박인다. 이런 감정은 부모에게서 느끼는 감정이어야 한다는 경고등이다. 상처받지 않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경고를 무시하면 안 되는데 자주 잊어버린다.

남편의 사랑이 충분히 차고 넘치다 보니 부모의 사랑을 남편 등에 업혀본다. 가끔 남편으로부터 서운하고 화가 피어나는 순간이 있다. 나의 결핍을 남편 등에 올려놓고 채워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나를 꼭 안아본다.


그래서일까 잔디 같은 엄마가 되고 싶은 나는 성인이 된 아이들을 향해 늘 손을 뻗어본다.

엄마 입장에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들이 매일매일 참으로 많다.

엄마로부터 받고 싶었던 따뜻하고 당연한 사랑을 어쩌면 아이들 뒤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내면 아이를 향해 손을 뻗는 건 아닌지 물음이 필요하다.

나에게도 막다른 길이 나타나기를 그래서 잔디처럼 위로 혼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날이 선물처럼 다가오기를 기다려 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날이 온다면 친구들의 사랑이 순백의 감사함으로 편안하게 내 곁에 머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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