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하나씩 물어봐. 잘 지내고 별일도 없는데 회사가 너무 바빠서 점심도 못 먹고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더니 손이 떨리네. 아침도 안 먹었는데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
여기서부터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 일단 전화 끊고 점심부터 먹어. 건강관리 잘해야지. 얼른 뭐라도 먹어.
분노를 넘어 친구가 미웠다. 화가 났고 그 후로 한 3개월 이상 내가 전화를 걸진 않았고 오는 전화만 받았다.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어졌다.
이가 아픈데 바쁘다는 핑계로 치료하지 못했다. 마침 시간이 생겨서 치과에 간 그녀의 검사 결과는 치료 시기를 놓친 염증으로 인해 잇몸뼈까지 상했다. 이를 발치해야 하고 뼈이식 후 임플란트까지 하려면 앞으로 1년 이상 치과에 다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화가 났다. 위로와 함께 치료 잘 받으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가만히 앉아서 화를 따라가 본다.
남이야 대추나무에서 감을 따던 개밥그릇에 밥을 먹든 무슨 관련이 있다고 화를 낼까?
남이야 남이라고! (나에게 설명해 본다)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을까?
상대를 향한 작은 애정이라도 있으면 화가 나고 애정의 강도에 따라 분노는 더 올라간다.
감정이 삼켜버린 나의 이성은 작은 부스러기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왜일까?
첫 번째는 책임감이 없어서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의 균형을 잃은 사람을 만날 때 분노가 생긴다.
위의 두 사람의 경우, 직장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직원이요 파트너이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어떨까? 가족이 아프거나 심한 병중에 있으면 가족 전체가 병에 걸린 듯 살아간다. 아파서 통증을 달고 사는데 기쁜 일이 생겨도 그 표정,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어떤 것들이 눈으로 들어와도 그 표정, 회색 얼굴로 만든 AI들이 사는 집으로 변해가지 않을까!
마음 한편에 돌덩이를 안고 사는 기분과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두 번째는 중요도의 순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때.
위의 두 사람 같은 경우' 내가 나 좋자고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을 위해서 일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다'라고 말한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가족을 단 1%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갔다.
그런 사람들은 빵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
가족은 서로가 안녕하도록 관리해야 하는 모든 책임을 기본으로 지켜야 하지 않을까?
또 나의 트라우마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던 아빠가 연애도 사업도 원도 한도 없이 하다가 내가 겨우 중학교 1학년 때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한양대학병원에서 전문 암 치료 병원인 원자력병원으로 옮겨서 집중 치료를 했다.
어느 날 아빠가 찰밥과 김초밥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준비해서 엄마랑 병원에 갔다. 아빠는 찰밥을 맛있게 드셨고 내가 본 마지막 아빠의 모습이었다. 병원에서는 강력한 진통제 처방밖에는 대안이 없다고 했고 아빠 스스로 퇴원 결정을 했다. 할머니와 지내고 싶다는 그의 결정에 따라 본가로 내려갔다. 분노의 실타래를 잡고 따라가자 본가에서 아빠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엄마가 대전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엄마 친구에게서 들었던 시점이었다.
며칠 후 유골함을 안고 엄마가 도착했다. 집과 아빠 회사 사이의 한강에 뿌려진 아빠의 모습을 예민하고 날카롭고 외로운 사춘기의 나는 어떻게 그 순간을 저장했을까?
위의 두 건과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이성을 상실한 나의 기억은 아빠를 잃은 아픔과 빠르게 섞인다.
걱정은 사라지고 분노를 표출하는 감정이 이유도 모른 채 늘 나를 지배한다.
분노가 올라올 때 걱정해야 해 분노해야 해라고 조용히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걱정이지!! 상대를 향한 빠른 쾌유를 마음속으로 바라본다.
분노가 걱정으로 바뀌는 단계. 셀 수 없는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얻는 상장이다.
갑자기 춤추는 감정 변화의 이유를 몰랐을 때 위와 같은 사람들을 어쩌면 스스로 피했고(함께 하기에는 힘들고 무거웠음)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관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미숙하고 상처받은 나라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했다.
나에게 서운했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해 본다.
한 줄 요약: 상대방이 통증을 달고 살아도, 건강관리를 잘하지 못해도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다. 나와 상대방은 다른 것이지 분노의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