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aycool Apr 05. 2024

강남구 신사동 555번지

내가 살던 동네

신사동 가로수길은 도로 양옆으로 은행나무가 심하게 울창해서 그늘 아래가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가 있었다. 넓은 도로가 무색할 만큼 차들도 잘 다니지 않아 노오란 낙엽들만이 군데군데 뭉쳐 나뒹굴었다. 여느 동네처럼 표구 액자 집, 식당, 작은 구멍가게 등이 있었고 그곳엔 큰 고모부의 건재상도 있었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내가 6살이 된 무렵 온 가족이 서울로 상경했다. 큰 고모네가 먼저 올라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빠는 매형을 따라 미장을 배우며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즈음 나머지 형제자매들도 뒤따라와 신사동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느라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신사동 고개 언덕 아래에 있는 강남구 신사동 555번지, 그곳에 우리 집이 있었다.     

‘점보’라는 큰 개를 키우던 간판 없는 동네 슈퍼 옆으로 틈 하나 없이 작은 집들이 한 몸처럼 붙어있었다. 슈퍼 바로 옆집은 남자아이 한 명을 키우는 싱글맘이 살고 있었고 그 옆집은 우리와 비슷한 또래가 있는 다섯 가족이 살았다. 마지막으로 좁고 깊은 흙길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초록 대문이 길목 중간에 상시 오픈 상태로 삐딱하게 서 있었다.     

우리 집터는 슈퍼 주변에 있던 집 중에서 단연코 가장 큰 집이었다. 그 집 전체가 우리 다섯 식구만의 편안한 휴식처였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주인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누었다. 집의 8할은 내 친구 민희네 집이었고 우리 집은 나머지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원래 하나였던 집을 나누었기 때문에 큰 부엌은 민희네 집 차지였고 우리 집은 부엌이 없었다. 외벽에 1평 남짓한 공간에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투명 슬레이트 지붕을 만들었다. 두꺼운 비닐 천막을 길게 덮자 임시 부엌이 생겼다. 엉성한 찬장과 부엌살림들은 쥐와 꼽등이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바깥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사이 중간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언니와 내가 누우면 딱 맞았다. 보통 일반적인 집은 현관문을 열면 신발장이 있고 거실이나 작은 부엌이 있다. 그런데 외부에서 문을 열자마자 언니와 내가 누워있는 방이라니. 어린 나이에도 그 구조는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었다.     

유일하게 민희네 집과 형평성이 맞았던 곳은 화장실이었다. 집 반대쪽 마당 끝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 안에 요강도 있었다. 요강을 새벽에 누군가 자다가 치는 바람에 오줌 난리가 났던 사건이 왕왕 있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지만 너른 마당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재미있는 장소가 되어주었다. 숨바꼭질을 하면 숨을 곳이 많았다. 마당에서는 줄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사치기, 땅따먹기뿐만 아니라 밭에서 직접 기른 상추를 따서 평상에 둘러앉아 삼겹살 파티를 할 수 있었다. 마당 구석구석 널브러져 있던 빨간 벽돌을 빻아 고춧가루도 만들고 군데군데 피어있던 민들레를 뽑아 된장찌개를 만들며 동갑 친구인 민희와 소꿉장난을 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마당이 있는 집을 참 좋아한다.      

민희네 아빠는 마당을 매일 깨끗하게 쓸고 청소를 잘하셨다. 그렇지만 민희네 아빠는 술 문제 때문에 가정이 늘 불안했다. 민희 아빠가 술을 드시고 늦게 오는 날은 민희엄마와 민희는 며칠간 피신을 다녀오곤 했다. 그날은 빈집에 화풀이할 대상이 없어서인지 우리 집으로 불똥이 튀었다. 민희 아빠가 새벽에 우리 집 현관 유리문을 주먹으로 깬 것이다. 유리 조각들은 언니와 내 다리 쪽으로 튀었고 다행히 추운 겨울이라 두꺼운 이불이 있어서 다치진 않았다. 다음날 민희네 아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빗자루를 집었다. 여느 때와 같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붕대 감은 손으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동네 파출부를 다녔다. 종종 그 양옥집으로 우리를 몰래 부르셨다. 식탁에 앉아서 그럴듯하게 차려 먹는 밥은 꿀맛이었지만 후다닥 도둑 밥을 먹는 것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런 기분이 자주 들자 엄마가 불러도 그 뒤로는 더 가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집은 남편 친구네 집이었다.)     

아빠는 전주에서 유리가게를 하셨다. 큰 누나를 따라 모든 걸 접고 가족 함께 2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 그 많은 서울 땅 중에 ‘강남구 신사동’이라는 곳으로 왔다. 친척이 모두 인근에 살았기에 동네 전체가 편안한 마을 같았다. 나중에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에 고모들이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 같이 어렵게 시작했지만, 각자의 능력과 성격, 운과 타이밍 등으로 돈을 잘 버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었다.     

압구정역 근처 남색 벽돌집 지하에 세 들어 살던 큰 고모네는 바로 맞은편 골목에 4층짜리 건물을 지었고 가파른 언덕 길가 쪽방에 살던 막내 고모네는 슈퍼 옆에 빌라를 샀다. 아빠와 함께 미장일을 하던 둘째 고모부네는 여전히 신사동에서 식당을 하신다. 가족 중에 건물과 아파트를 가장 많이 갖고 계신다.     

부모님은 20년 넘게 신사동에 살며 막노동, 붕어빵 장사, 파출부, 식당, 횟집, 갈빗집 등 해보지 않은 일 없이 해봤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서울살이에 가세는 더 기울어져만 갔다. 결국, 신사동에 정착하지 못하고 쫓기듯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성공도 하고 돈도 많이 벌었다. 20년가량을 살았던 진짜 고향 같은 신사동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아련한 동네가 되었다.


어려움이 겹치고 겹쳐 남편과 아내의 인연 또한 아름답게 정착하지 못하고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record’라고 적힌 아빠의 낡은 노트 한 권만이 떠나는 아빠의 가방에 딸려가지 못했다.     

덩그러니 엄마의 집 한구석에 남아있던 노트에는 낭만과 꿈이 가득했던 아빠의 지난 시절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온실에. 그것과도. 같은 세상을 책임 없이 살다가. 인간의 고뇌를 키우는 군생활을 마치고. 제대와 동시에. 꿈은 컸다. 나는. 본래. 자연의 동심으로 돌아가. 초원에 목장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제대와 동시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78년 어느 날 계획도 목표도 없이 전주로 우리 세 식구는 이사했었다. 막연한 그 생활이란…  흔들리기 시작하는구나. 참자. 무언가 배우자 직장을 옮기면서 전진하자.

친구가 하는 유리가게에서 유리기술을 배웠다. 기간은 한 달이었다. 그 심정은 누구한테도 말 못 하리라. 그 뒤로 첫 사업이라고 시작한 게 79년 2월 초라한 점포였다. 그 운도 얼마 길지는 못했다. 절망, 실망과 번뇌는 또 시작되었다. 나의 급한 성질 때문에 이사 결정을 내리고 5월에 중노송동으로 이사했다. 그 후로 1년이 되었다. 현재의 이 심경은 아무도 모른다. 장사…. 남의 호주머니를 탐내는…. 장사란 속이고 속는, 이 사회는 돈이 돈을 번다. 장사란 돈, 위치, 신속한 투자로…. 내 어찌 그 일을 감당하리오.

79년 6월 1일,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가로수길의 간판은 갈 때마다 달라져 있다. 지난번에 있던 화장품 가게가 없어지고 새로운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다. 테일러샵 직원은 멋진 검은 슈트 위로 미끄러지듯 다림질 중이다. 과거, 이곳에는 흙손(미장칼)을 들고 시멘트 바닥을 다림질하듯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33살의 아빠도 있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하루하루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지던 젊은이였다.          

이전 02화 이웃집 여자는 대체 왜 그랬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