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행복
"여보세요?"
"여기 짜장면 1개 짬뽕 2개 배달해 주세요."
"주소 불러주세요."
"음…. 대광철물점 끼고 한 50미터쯤 골목으로 쭉 들어오시면 왼쪽에 우유 주머니 달린 초록 대문 있거든요? 그 집으로 들어오셔서 우측에 있는 계단 지하 1층 첫 번째 집이요."
한 번도 쉽게 중국 음식을 배달시켜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동네의 랜드마크 하나쯤은 설정해 두고 포인트를 짚어주며, 오는 사람의 동선을 따라 그림 그리듯 위치를 설명한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큰 화두는 ‘가난한 내 집’이었다. #가난 #집 이란 키워드에 민감해서 한 번도 ‘가난’이라는 단어를 마음 편하게 입 밖으로 내뱉어 보질 못했다.
동네에서 식당을 하셨던 부모님이 직장인이 아닌 자영업인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바쁜 엄마가 고춧가루를 넣고 빨갛게 무친 단무지 반찬이 부끄러워 도시락 뚜껑을 반쯤 열어놓고 먹었던 점심시간이 끔찍했다.
가난한 존재는 언제나 작고 초라했다. 세월이 흘러도 가난함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스무 살이 넘었을 때는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가난이라는 불결한 때를 가리거나 지우는 데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어느 날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몇 번을 좋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우리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던 소개팅남이 있었다. 이미 여기서부터 우리는 안될 사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거절하는데 눈치 없게?
집까지 느릿느릿 걸어가는 길에 내 머릿속은 영화 ‘매트릭스’의 초록색 숫자 코드의 움직임처럼 빠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어쩌지? 지난번처럼 동생을 나오라고 할까?’
‘집에서 심부름시켰다고 슈퍼마켓 들렀다 가야 한다고 할까?’
‘집이 엄격해서 남자랑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키면 안 된다고 할까?’
머릿속이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있는 그사이 소개팅남과 내 발길은 어느덧 집에 들어가는 언덕 초입에 다 달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분석을 마친 뇌가 내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라고 지시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언덕 맞은편, 드문드문 창문들이 사각형으로 반짝이는 롯데캐슬 101동을 향해 있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고 나는 롯데캐슬 101동 쪽을 향해 최대한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아주 천천히 등이 따가워 타버릴 것 같은 시선을 뒤로하고 나에게로 향한 소개팅남의 시선이 멈추길 바라며 걸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어차피 나는 저 사람을 만나지 않을 거니까. 진땀 나는 상황을 겨우 넘기고 한참을 있다가 숨어있던 곳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올라 집으로 갔다.
그 당시 나는 우리 집이 들키기라도 하면 분명 사람들이 이렇게 수군거릴 거라는 생각 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아?’
‘헐…. 이렇게 가난한 사람도 있어?’
‘내가 생각한 너의 이미지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실망스럽다. 이렇게 못 사는 줄은 몰랐네.’
그리고 속으로 나에게 경악과 조롱을 할 것만 같았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 벽은 더 높아졌다. 아무도 볼 수 없게 꼭꼭 숨겨있던 우리 집을 감추려고 거짓말이 늘어날 때마다 나의 위선이 나 자신도 역겹고 한심스러웠지만 나는 더 완벽하게 가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계속 그렇게 ‘우리 집 수호작전’ 임무는 잘 수행되고 있었다.
확고한 나의 신념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만든 완벽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잘못된 사람이었고 돈이 없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뜻이었다. 특히 부와 가난 확연하게 드러나는 잣대가 되는 기준…. 그것은 바로 집이었다.
그만큼 ‘가난한 집’은 철저하게 가리고 가려져야 했다.
내가 바라는 집의 기준은 주방과 거실 분리는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다. 소파는 못 놓더라도 온 가족이 나란히 앉아서 티브이를 볼 수 있는 거실 공간이 있다면 화목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냉장고 자리가 부엌에 따로 마련되지 않아 방으로 넣어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체리 색 교자상을 더 이상 장롱 옆 구석에서 넣었다 뺐다 하지 않고 작더라도 식탁을 놓을 수 있는 자리가 있는 부엌. 세탁기가 돌아가고 배수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한숨을 내쉬며 양말을 벗고 신으나 마나 한 욕실 슬리퍼에 발을 넣지 않아도 되는 곳. 그 차갑고 찝찝한 진회색 한강 물에 발을 담그지 않아도 되는 쾌적한 욕실을 꿈꿨다.
보이는 곳, 남들 시선이 닿는 곳인 집은 어린 시절 나와 동일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만약 더 좋은 환경의 집에 살았다면 이렇게 가난한 나를 극도로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장담하건대 나는 좀 더 큰 집이나 더 좋은 환경을 원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집이 아닌 다른 것에 매몰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대상만 바뀔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 내가 그때의 나에게 돌아가서 한마디 해준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소소하지만 미소 지었던 것들을 떠올려 봐. 나쁜 것만 있지는 않을 거야. 억지로 행복하게 지내라고 하진 않겠어. 하지만 즐거운 추억도 분명히 있을 거야.'
초록 대문 집을 처음 부동산 아줌마를 따라 엄마와 단둘이 갔던 날, 언덕 제일 깊은 골목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열고 계단을 꺾어 내려갈 즈음, 들어가기도 전에 마음에 들지 않아 엄마에게 눈짓으로 ‘여긴 아니야’라는 신호를 보냈었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집과 담벼락 사이 통로. 그 길을 따라 건물 뒤로 돌아가면 나무 한 그루와 아주 작지만 작은 화단이 있었다.
“이곳에 캠핑 의자를 놓고 햇빛 좋은 날에 앉아서 쉬면 좋겠다. 그리고 삼겹살도 구워 먹자!”라고 엄마랑 소박하게 웃으며 그 집에 살기로 결정했었다. 이사하고 며칠 있다가 예쁜 꽃들을 한 아름 사서 꽃을 심어놓고 엄마와 함박웃음을 지었다.
살았던 곳마다 재래시장이 가까이 있어서 시장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시금치, 열무김치, 호박 등 채소를 깔아놓고 장사하시며 늦은 점심으로 도시락을 드시던 채소 가게 아줌마가 있었다. 그 아줌마가 어떤 반찬을 싸 왔는지가 궁금해서 좌판 위의 채소보다 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줌마가 파는 채소로 만든 반찬인지 아니면 의외의 반찬인지, 맛은 어떨지, 그게 참 궁금했다. 대체로 시장 아줌마들은 김치나 젓갈류 등 건강한 반찬을 싸 오셨다. 소시지나 햄 같은 예상외의 반찬은 안 드셨다. 두부 파는 아저씨는 시장 초입에 자리를 잘 잡아서 장사가 잘되었다. 아저씨는 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람들은 아저씨의 기분을 사 갔다. 시장은 사람 사는 재미가 있었다. 바닥은 생선비린내가 섞인 찝찝한 액체가 여기저기 흥건했지만 이내 과일가게가 쭉 늘어진 점포들을 지나칠 때면 향긋한 과일 냄새가 찝찝했던 기분을 환기해 주었다. 단돈 만 원으로 양손 가득 검은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집으로 왔다.
우측 계단 지하 1층 첫 번째 집, 안방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한여름에도 차갑고 시원한 방바닥에 누워서 선풍기 미풍으로도 거뜬히 버티던 소소한 8월이 있었다. 나를 미소 짓게 하던 것들은 스쳐 가듯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내 마음속에 있다. 그 속에는 귀여운 화단에서 나는 예쁜 꽃향기도 있었고 시장 아줌마의 맛있는 반찬 냄새와 두부 아저씨의 환한 미소도 있었다. 그리고 향긋한 과일 냄새도 있었다. 기억 속 그 냄새들은 원하면 언제든 소환할 수 있다. 좋은 기억, 그 안에 내가 있다. 내가 꺼내주니 자라고 자라서 함박웃음을 만들어준다. 초록 대문 속에 아기자기한 행복이 분명 숨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