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거리
초등학교 가정환경조사서에는 적어야 할 것들이 참 많았다. 보호자의 최종학력이 어떻고, 직업은 무엇인지, 현재 사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셋 중 하나의 옵션을 골라야 했다. 집의 형태도 아파트, 양옥, 한옥인지 세세히 적어내야 했다.
그 얇은 종이 한 장을 채우는데 어린 나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작성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식당을 하시던 아버지는 직업란에 ‘자영업’이라고 적어주셨는데, 어린 내가 해석한 자영업이란
‘나는 가방끈도 짧고 능력도 없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고되게 식당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입니다’라고 적어서 제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회사원’이라고 적어오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친구들의 아버지는 고급스럽고 근사해 보였다. 지글지글 끓는 뚝배기, 반찬과 밥을 담은 사각 쟁반, 아빠의 머리 위에 있는 그것들은 냄새를 풍기며 동네의 사무실, 화실, 가게 등을 다녔다. 배달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숨기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다.
친구들의 차는 검은색 세단이 주로 많았다. 가장 자가용다운 차는 승용차였다. 장 보는 용으로 구매한 낡은 황토색스러운 금색 봉고차는 어딘지 초라해 보였다. 성장하면서 장사로 어느 정도 작은 성공도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꾸준히 봐왔다면 사각 은쟁반, 낡은 봉고차도 어느 시점에서는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알량한 노력은 거기까지였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간식을 먹으며 친구 아버지가 질문하셨다.
"아버지는 무슨 일 하시니? "
“펀드 매니저예요.”
“오, 그렇구나. 돈도 많이 버시겠네. 공부도 많이 하셨을 것 같고”
“어느 학교 나오셨는데?”
"음….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어색한 침묵과 가벼운 대화가 짧게 오가다가 “놀다 가렴” 한마디 남기시고 친구 부모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하아…. 그날의 진땀 나고 난감한 상황은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 이후로 어설프고 난감한 상황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서류에 합격하고 지원한 회사 면접을 보러 가기 전날이었다. 흔히들 준비하는 면접관의 예상 질문이 있다.
‘본인의 장단점을 얘기해 보세요.’
‘이 회사에 입사하면 당신은 회사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일하면서 동료와의 갈등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대처할 건가요?’
뻔하지만 필수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준비해놓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내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질문에만 꽂혀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철두철미하게 준비 중이었다. 면접 당일, 업무와 능력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하고 예상대로 대표님은 가족관계에 대해 가볍게 질문을 하셨다.
“아버지의 직업이 뭔가요?”
"네, 아버지의 직업은 금형을 제작하는 회사를 운영하십니다. "
대표는 고개를 끄덕 한번 하고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가장 긴장되는 질문이 끝나자 안도감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준비한 말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상한 허망함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직업을 설명하자면 가로길이 4센티 남짓한 작은 셀 안에 쓰기에는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길었다.
‘주식으로 한 방을 노리며 일정한 수입 없이 아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놀고먹음. 그리고 책상에 앉아서 연필과 자를 가지고 그래프를 그리는 일’이라고 적어야 했을 터이다.
성실함으로 적은 돈이라도 노동을 해서 차곡차곡 버는 데는 소질이 없었던 아버지. 내가 생각한 아빠의 문제는 이랬다. 책임질 아내와 자식들이 있음에도 아버지로서 성실하게 고정적인 수입을 벌어다 주지 않은 것.
이것까진 지켜지지 않아도 좋다. 아내가 생활력과 능력이 있으면 남편이 꼭 밖에 나가서 돈을 벌라는 법은 없으니까. 나는 그 정도의 개방적 사고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엄마의 귀가 예상 시간이 되었을 때, 시곗바늘이 조금이라도 넘어가는 날이면 ‘뭐 하느라 늦었냐’부터 ‘다른 놈을 만나고 왔냐’ 등 온갖 이유를 갖다 대며 잡도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마땅한 이유가 없으면 ‘집이 엉망이네’, ‘옷을 아무 데나 걸쳐놓았네’, ‘반찬이 짜네’ 등 만들어 낼 수 이유는 수십 개라서 한 개씩만 돌아가며 닦달해도 1년 내내 사람을 꼼짝없이 숨 막히게 하는 능력만큼은 탁월했다. 자신이 불리한 상황도 말발로 교묘하고 유리하게 이기는 재주가 있어서 그 능력을 회사에서 발휘했다면 최고의 협상가가 되셨을 거다.
이력서를 제출하기 전 혼자 끙끙 앓던 차에 동생이랑 얘기하다가 힌트를 얻었다.
“내 친구 아빠가 금형 제작하는 사업 하는데 안정적으로 돈도 잘 번대”
“금형?” 생소한 단어에 나는 금형이 뭔지 알아보았고 흔히 알지 못하는 일이라 이 정도면 아버지의 직업란에 적어 낼 만하다고 생각했다. 금형에 대해 일단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 내 거짓말이 들통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형을 제작하는 회사 중에서 하나를 골라 이름과 위치도 외우고 하는 일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아버지의 가짜 직업을 만들었다.
아빠의 직업은 다양했다. 요리사, 펀드맨니져, 금형 제작하는 사업가 등 상황과 내 기분에 따라 바뀌었다. 매일 집에만 있으셨는데 내 덕분에 직업이 몇 개씩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모르셨을 거다.
아빠는 방 안에 앉아서 주식 차트를 보고 계셨지만 온종일 엄마를 괴롭힐 궁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엄마를 괴롭히고 가족을 힘들게 하는 아버지에게 어느 날 모진 말도 했었다.
“아파트 경비원이라도 지원해서 매달 50만 원이라도 좋으니 나가서 일 좀 하시면 안 돼요?”
어린 시절에는 멋모르고 남들과 비교하고 신경 쓰고 살았다. 내 기준에서 뭐든 좋아 보이는 것과 비교해서 그렇지 못한 내 현실을 비관했었다. 그래서 식당을 하시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그 식당들도 엄마가 없었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커가면서 아버지와 벽이 생기면서부터는 아버지의 직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이력서에 있던 아버지는 편안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힘들지만 가족을 위해 매일매일 직장에 나가시고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들어주는 아버지, 사소한 일에는 허허 웃으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야기해 주는 아버지, 머리를 긁적이며 ‘이건 아빠가 잘못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아버지, 엄마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표현해 주는 아버지, 항상 웃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이야기할 때면 온몸이 경직됨을 느낀다. 좋은 감정이 떠오르질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를 언급하는 것이 몹시 불편하고 힘이 들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아버지의 직업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아버지와의 관계까지도 드러내야 한다는 복잡한 심리적 표현이었다.
나는 최고의 연기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고해성사하듯 우리 집의 불안한 가정사를 눈물로 모두 털어놓아야 했기에. 중간도 없이 극단적인 그 두 가지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리숙한 나였다.
아버지에게 가장 모진 말을 많이 한 자식임에도 유일하게 아버지와 가끔 연락한다.
홀로 사는 70이 넘으신 아버지는 지금도 주식 차트를 보며 인생 한방을 꿈꾼다.
"내가 30년 동안 공부하고 만들어놓은 결과가 빛을 발하는 날이 곧 올 것 같다."
그날이 곧 올 것 같다는 말은 30년 전부터 변함없이 들어온 말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대꾸했다. "고생하셨어요. 이번에는 꼭 잘 되실 거예요."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만큼 아버지의 존재가 내 인생에서 많이 흐려졌다. 이력서를 낼 일도 없어졌지만 나 또한 사람들이 아버지의 직업이 뭐냐고 물을 정도의 어린 나이가 아니다. 아버지는 노인이 되었고 나는 아버지의 배경이 필요 없어졌다.
이제 아버지를 더는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불안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는 더 난폭하고 불안한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엄마가 말해주길, 시집가자마자 시아버지가 소의 코뚜레를 잡아끌고 코에서 피가 날 때까지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패던 끔찍한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아버지에게는 따뜻한 아버지가 없었다. 나는 이제 그런 아버지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다. 지금 아버지와 나의 거리만큼 딱 그 정도의 안부와 염려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