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애 이야기
펑!
자정이 되자 호박 마차와 화려한 드레스는 온데간데없고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자신을 본 신데렐라의 심정은 어떨까?
12시를 갓 넘자 내 환경도 모두 원래대로 돌아온 것만 같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신나는 파티장에 있었는데 말이다. 30분 차이의 이 극과 극 환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면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이런 상황을 알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또각또각.. 거친 시멘트 바닥을 살구색 에나멜 하이힐이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예쁘고 반짝이는 하이힐이 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으로 힘겹게 언덕에 다다랐다. 구두 굽이 주인을 잘못 만나 사나운 꼴을 보고 살아서 부드러운 살갗 안에 있는 검은색 플라스틱 뼈가 흉악하게 군데군데 그러나 있었다.
낡고 오래된 초록 대문은 조심스럽게 ‘끼익’ 하며 닫아도 어김없이 마지막 찰나에 철-컹 하며 진동과 함께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요란하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화려한 원피스가 더러운 담벼락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계단에 한 발짝 내디딘다. 치마를 두 손으로 모아 잡고 꺾어진 지하 계단을 내려간다.
쭈그리고 앉아 화장을 지우고 뻐근한 등을 펴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화장실 창문으로 보이는 저 롯데캐슬은 말 그대로 태생이 왕자와 공주인 사람들이 살 것만 같은 캐슬이다. 순백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는 깨끗하고 하얀 외제 차에서 내리겠지? 황금색 엘리베이터를 타고 장갑을 낀 검지로 버튼을 누를 것이다. 사시사철 춥지도 덥지도 젖지도 더러워지지도 않고 순조롭게 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다. 현관 앞에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구두 굽의 왼쪽과 오른쪽 볼이 맞닿아 가지런히 놓여있다.
당당하고 멋진 이 여성은 집에만 오면 다른 사람이 된다.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주워 입는다. 이 집에서는 예쁘게 홈웨어를 챙겨 입을 맛도 나질 않는다. 겨울엔 꼭 깔깔이를 입는다. 깔깔이를 걸친 말도 안 되는 믹스 앤 매치 스타일링을 보고 가족들은 나에게 얘기했었다.
“너 이런 모습 다른 사람들은 알까?” 낄낄 웃으며 언니가 짓궂은 질문을 한다.
“아니, 절대 모르지. 알면 도망갈걸”
참고로 렌즈를 빼고 검은 테 안경까지 착용하고 나면 바보 같은 맹꽁이가 따로 없다.
안경 쓴 모습은 남에게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가장 최악의 모습이었다.
외박이라도 하는 날에는 렌즈를 끼고 자느라 눈이 찢어질 듯한 고통도 견뎌내야 했다.
두바이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갈 예정이라 편안한 복장에 안경을 끼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기내 중앙의 네 자리 중 오른쪽 끝 좌석에 배정받아 편안한 마음으로 착석하고는 안전띠를 했다. 리모컨을 들고 이것저것 조작하다가 테트리스 게임을 발견했다. 의자에 두 발을 올려 웅크리듯 앉아 신나게 게임에 빠져있는 찰나 존재를 못 느끼고 있던 내 왼편에 앉은 남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Can I play this game with you?”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소년 같은 장난기 어린 그의 표정과 미소가 거부감을 완화해 주었다.
“sure”
안경 쓴 모습으로 처음 외부인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게 다름 아닌 외국인. 무릎과 엉덩이가 늘어난 juicy couture 츄리닝을 입고 맹꽁이 안경을 쓰고 있는 내가 누군가와 말을 섞고 있다니. 처음부터 알몸 같은 민낯을 보여서일까? 우리는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밥도 먹고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꽤 친해졌다.
브라질 출신의 아랍에미리트 항공사 승무원인 Pedro는 휴가를 받아 한국으로 여행을 가는 중이라고 했다.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배치된 눈코입이 공부 잘하는 똘똘한 학생 같은 느낌을 풍겼다. 양쪽으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태어날 때부터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마냥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장난기를 머금은 눈빛은 해맑고 부드러운 Pedro의 소년 미를 더 부각시켜 주었다.
흰 피부를 가져서 그런지 내가 상상한 브라질 사람의 외형은 아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브라질에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인종이 사는데 그중 유럽계 백인들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비행시간이 1시간 남짓 남았을 무렵, 그는 나에게 주말에 만날 수 있냐고 물어봤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의 나한테 데이트 신청이라니 끔뻑끔뻑 안경 안에서 눈알을 좌우로 굴리다가 다시 한번 ‘sure’라고 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you’re so cute‘
연락처를 교환했고 주말에 시청 앞에서 만났다. 그날은 렌즈를 끼고 화장을 곱게 하고 나갔다. 잠시 못 알아보는 듯했지만 내가 먼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내 모습을 기대했다는 듯 화장 안 하고 안경 쓴 모습도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고 말해주었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2번 정도 만나서 서울 구경을 함께했다. 함께 차를 마시거나 길을 걷다가도 문득문득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귀여운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고백하건대 자신감을 얻어 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릴 의도적인 애교 짓도 했었다. 그의 입꼬리가 더 귀에 걸렸다.
반전인 내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나를 대하는 태도와 눈빛이 한결같다는 게 신기했다. 나도 어색해서 어찌할 줄 몰라 숨기고 싶은 내 모습을 오히려 그가 나보다 훨씬 잘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큰 사람 같았다. 넓은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마음도 넓은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그는 가야 할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떠난 후 몇 번의 이메일이 오갔다. 좋아하는 음악도 보내주고 근황도 얘기하며 몇 달씩 연락하고 지냈다. 몇 번의 드라마 같은 만남은 실효성을 잃고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세상에 수천 가지의 음식과 문화만큼 다양한 사람이 섞여 살고 있다. 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다. 자신만의 개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듯 선호하는 취향도 제각기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안경을 쓴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수도 있고(참고로 7살 딸은 안경 쓴 사람은 모두 멋져 보인다고 했다) 키가 작은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다. 통통하고 귀여운 볼살이 사랑스러워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커트 머리의 사내아이 같은 매력의 여성에게 끌리는 남자도 있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남자가 이상형인 여자도 있다.
이 말도 물론 맞다.
하지만 내가 느낀 세상은 그렇게 다양한 취향이 골고루 섞여 분포되어있지 않았다. 이왕이면 키 큰 사람, 얼굴은 작고 비율과 몸매가 좋은 사람, 잡티 없이 피부가 깨끗한 사람,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안 얼굴을 가진 사람, 코가 오뚝한 사람, 머리숱이 많은 사람 등 알게 모르게 대부분 사람이 호감으로 정해놓은 기준이 있었다. 특히 내가 사는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었다. 예민한 나는 착실하게도 그 기준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살았다.
안경 쓴 모습=추한 모습이라고 단정 지어 놓고 살아가려 하니 나의 다양한 매력을 발산할 기회를 많이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Pedro가 보냈던 이메일을 찾아보았다. 제 3세계 음악 같아 당시에는 아예 들어볼 생각도 안 했던 첨부파일을 열어보았다. (그때 나는 Pedro에 힙합 음악을 보냈었다.)
그가 보내준 음악은 Seu Jorge라는 브라질의 유명 가수의 노래였다. 노래 제목은 ‘Mina do condominio’와 ‘burguesinha’였다. 포르투갈어라 정확한 번역은 어렵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마음을 표현한 가사 같다.
그런데 맹꽁이 같은 안경에 늘어난 츄리닝을 입고 쭈그리고 앉아 게임을 하고 있는 나에게 어떤 매력을 느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