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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ycool Apr 12. 2024

흑인 음악과 복분자에 취해

나의 연애 이야기

나얼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얼도 자신의 몸 안에 흑인의 그루브 한 피가 흐른다고 느끼는 걸까? 잠깐 피식 웃으며 회상한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흑인의 쏘울을 깨워준 그를….

     

흑인 음악 커뮤니티의 리더였고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음악들을 알려주고 좋은 음악을 추천해 주었던 그와는 온라인 음악 커뮤니티에서 만났다. 나와 이니셜이 같은 MK였다. 그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많았고 특히 섹시한 여성들이 우글거렸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시크한 위트를 날리던 그와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티키타카로 맞받아 칠 줄 알았던 나는 금세 가까워졌고 연인이 되었다.      


거의 빡빡이에 가까운 짧은 머리에 이마 라인은 흑인스럽게 관자놀이 주변으로 계단같이 각이 맞추어져 있었다. 옷 입는 스타일과 제스처는 영락없는 흑인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음악과 함께했고 2 Pac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 당시 나는 회사를 안정적으로 다니고 있었고 그는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직장인들의 패턴이 그렇듯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처럼 주말만을 기다리며 어디를 갈지 뭐 할지 미리미리 놀러 다닐 계획을 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적극적으로 주말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돈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복잡한 그의 마음은 모른 채 흑인 음악으로 하나가 된 우리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졌다.     

용기 내 그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집은 유광 상아색 타일로 외벽을 마감한 건물이었다. 1층은 사는 내내 내부를 알 수 없이 셔터가 365일 닫혀있는 상가였고 우리 집은 그 건물 2층 201호였다. 낡긴 했지만 방 3개에 거실과 주방이 분리된 구조였다. 거실엔 작은 소파를 놓을 수 있었고 나무 프레임으로 된 큰 유리창이 있었다. 나무가 오래되고 낡아 열고 닫을 때 뻑뻑하긴 했어도 처음으로 햇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들어오는 집에 살게 되어 그 행복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잘하고 오묘한 격자무늬가 있던 불투명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우리 집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던 것도 같다. 내가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 것을 보면. 어두웠던 마음까지 밝게 비춰주는 그 집은 단연코 그동안 살았던 집 중에서 최고였다.     


맙소사! 

한 번도 친한 친구조차 초대한 적이 없었던 나인데 남자친구를 초대하다니!      

당일이 되자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불안감과 한 번씩 훅 밀려오는 후회 등이 뒤섞여서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그를 맞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면 음료나 차를 내줘야 할까? 

어색할 수 있으니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놓을까? 화장실 머리카락은 다 치운 게 맞지?      

지저분한 주방 벽타일이 거슬려서 부랴부랴 급하게 타일 시트지로 붙인 게 티가 나지는 않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체크했다.     


번뜩 술을 한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술이 들어가면 왠지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썬키스트 유리병에 진한 자주색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뚜껑을 여니 뻥 하는 소리가 났다. 가뜩이나 불안해서 벌벌 거리고 있는 내 심장을 터트리는 것 같아 깜짝 놀았다.     

그 안에는 엄마가 직접 담근 복분자주가 들어있었다. 내 심장과 불안한 마음을 차분하게 눌러주길 바라며 복분자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 진정되는 듯하더니     


아뿔싸!      

진정시킬 내 불안만 생각했지      

새빨개질 내 용안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올 시간은 다가오고 얼굴은 빨갛다 못해 흡사 복분자 주색과 맞먹고 있었다.     

옷가지들을 장롱에 대충 쑤셔 넣고 우왕좌왕하며 집안을 왔다 갔다 하던 중 익숙하지만 공포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를 보자마자 2 Pac의 ’changes’처럼 속사포 랩을 뱉어냈다.     

‘너무 더워서 냉장고에서 포도 주스인 줄 알고 마셨던 게 알고 보니 복분자주더라고 그래서 얼굴이 이렇게나 빨개졌어…’ 내 말이 이렇게나 빨랐던가?     

“응, 그랬구나.”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는 깨끗하고 티 없는 에어 조던 미드 화이트를 얌전하게 벗어놓고 거실을 거쳐 소파에 앉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농염한 빛을 받아 계란처럼 동그란 그의 두상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술기운인지 빛 때문인지 아름다운 모습의 그와는 정반대로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가도 갑자기 떠오른 듯 벌떡 일어나 식탁을 닦아대거나 아무 의미 없이 화장실을 들어갔다. 거울 한번 보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아는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그는 매우 조화롭게 우리 집과 어울려있었다.     

어색함에는 서로의 몸에 집중하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들어본 적 있는가?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머리와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어느새 그의 무릎에 앉아 마주 보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내뱉을 때마다 내 몸 안에 있던 알코올이 그의 살에 부딪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알코올이 섞인 공기가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복분자주의 향기까지 더해 분위기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더욱 밀착했고 신경 쓰였던 주변의 것들은 작은 먼지처럼 사라지더니 그와 나는 한 몸이 되었다. 불안은 먼지 사이의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처음으로 우리 집 현관을 열고 금기시되었던 ‘나의 집’ 봉인을 최초로 풀었던 사람.     

집을 오픈 한 이후로 내 마음도 방정맞게 활짝 오픈해 버렸다. 철저하게 감추고 살았던 세월에 비해 이리도 쉽게 마음을 열어젖힌 내 모습이 우스울 만큼. 어쨌든 나는 그와 잘 되길 바랐다. 이제 내가 가진 패를 다 보여주었고 그의 결정만이 남아있었다.     

직접적으로 결혼하자고 하지는 않았지만 내 나이를 언급하며 은근한 구애를 지속적으로 했다. 적극적으로 그의 집과 가족들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진로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현재 우리의 연애가 버겁고 힘들다고 했다. 우린 결국 헤어졌다.      


결과적으로는 그와 맺어지지 않은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나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 부담스러워서 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이후의 연애 내공을 쌓으며 터득했기 때문이다.      


몇 년이 흐른 후 그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 프로필 사진을 보니 더 예뻐진 것 같네?”     

“응, 고마워. 아주 잘 지내고 있지.”       

“남자친구는 있고?”     

“응, 남자친구 있어.”     

“그때 다니던 직장은 아직 잘 다니고?”     

“최근에 더 큰 회사로 옮겼어.”     

“여전히 열심히 잘살고 있구나. 멋지다.”     

“고마워. 너도 잘 지내.”     

지금 외국에 취업해서 살고 있다는 소식까지 듣고는 깔끔하게 그와의 관계가 마무리되었다.     


그와 결혼을 했다면 나는 지금쯤 레게머리를 하고 우리 아이들은 무조건 ‘조던’만 신겼을까? 피식 웃는다. 아마 그는 지금도 빡빡머리에 깨끗한 조던을 신고 있을 것 같다.     

나얼의 흑인 초상화 작품들을 보고 이렇게 실실 웃고 있다. 남자친구를 처음 집으로 초대한 엄청난 날의 기억, 웃기고 순진했던 나의 엉뚱한 행동들, 흑인 음악을 사랑했던 열정들이 새록새록하다.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던 ‘우리 집 초대 사건’을 이렇게 웃으면서 떠올릴 거라고 그때는 전혀 상상하지 않았는데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오랜만에 2 Pac의 ‘Life goes on’을 플레이리스트에서 찾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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