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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ycool Apr 12. 2024

오 서방의 그림책

나의 연애이야기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다.      

원래도 검은데 바래지지 않게 한번 더 덧칠한 것처럼 검고 또 검다.     

단연코 크기에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치 내가 이 구역의 왕이라고 뽐내는 듯이.     

예전에 봉숭아학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오 서방이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개그맨 오 서방이 아닌 현실에서도 오 서방이 존재했다.     

그는 나를 결혼식에서 보았다. 풍성한 웨이브에 유독 광이 나는 피부에서 시선이 사로잡혔고 타이트한 청바지와 실루엣이 드러나는 티셔츠 위로 샛노란 공단 크롭재킷을 입은 그녀에게 계속 눈길이 갔었다고 한다. 친구를 통해 그녀와 소개팅 주선을 부탁했다.     

그렇게 우리는 소개팅에서 처음 만났다.

내 친구를 통해 그의 정보를 들었다. 점잖은 사람이고 유명 대기업의 회사 법무팀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직업을 듣자마자 조금 딱딱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결혼식에서 나를 보고 호감을 느꼈다고 하니 일단 만나는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하객 중에서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것과 같았다.     

그의 첫인상은 공부를 정말 잘했을 것 같은 모범생 외모에 편안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왔을 법한 바르고 착한 이미지의 그에게는 단 하나 주목할만한 포인트가 있었다. 바로 커다랗고 볼록한 왕 점이었다. 신기하게 코 옆에 있는 그의 왕 점은 그를 전혀 다른 이미지로 만들어주었다. 포토샵의 도장 도구(Clone stamp tool)로 한 번만 클릭하면 그는 오 서방에서 순식간에 호감형으로 변신했다.

      

"미술을 전공한다고 들었어요. 그림책을 좋아하는데 선물로 준비해 왔어요. 여기요, 받으세요."    

정성스럽게 포장한 선물과 카드를 나에게 건넸다. 소개팅 첫날 이런 선물을 준비해 오는 성의를 보였던 그는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이 분명했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오 서방은 단어 한 문장도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입 밖으로 내보내는 사람이었고 대화하는 내내 질문도 많이 하고 음식도 덜어주며 섬세하게 나를 배려해 주었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왕 점만큼은 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검은 왕 점뿐이었으니까. 내가 저 왕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몇 번을 만나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그를 만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그의 선물을 뜯어보았다.     

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이라는 책이었다. 책 표지를 넘기니 우리의 만남이 기대되고 이 그림책을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따스한 메시지가 담긴 엽서가 보였다.     

그 페이지에는 그림 놀이로 만들어진 그림들이 알록달록 그려져 있다. 그림 놀이는 두 명이 함께하는 재미있는 놀이이다. 누군가 어떤 모양을 그리고 나면 다른 사람이 그 모양을 보고 연상되는 이미지를 떠올려 코끼리, 상어, 병아리, 구두 그 어떤 것이든 그림으로 연결해서 완성하는 놀이이다.     

그림 놀이에서 처음 그리는 모양은 그 어떤 형태도 없다. 한쪽이 볼록 튀어나온 동그라미도 있고 불규칙한 삼각형 모양도 있다. 거기에 다른 사람이 재미있는 발상으로 물건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아는 어떤 것을 탄생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완벽하게 멋진 작품이 완성된다.     


나는 왜 오 서방의 점을 지우고 싶었을까? 

내가 바라는 이상형에는 점의 크기까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정해져 있나 보다. 

지름 2mm를 넘지 않을 것. 두께는 없어야 함.     

점이 없으면 너무도 완벽해서 평생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았을까?


나는 완벽한 모양의 사람이 아니다. 그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그렇다.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허상을 좇는 것과 같다. 평생을 옥에 티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실수하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 집의 귀염둥이 두 녀석은 앤서니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을 정말 좋아한다. 보고 또 봐서 많이 닳고 닳았지만 나도 이 책을 소중하게 아낀다. 책 안에는 같은 듯 미묘하게 다른 그림을 비교해 놓고 다른 곳을 찾아내는 페이지도 있고 유명한 명화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장면들도 나온다.      

조금은 어설프고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서 완벽하진 않아도 재미있는 발상으로 그림 놀이를 그려가듯 보듬고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 남녀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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