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애이야기
“우리 50 일만 사귈까?”
나의 첫 연애는 대학교 1학년 때 시작되었다. 짧은 인연이라 어떻게 만났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당시 유행하던 3대 온라인 채팅 사이트인 스카이러브, 세이클럽, 버디버디 중 하나였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우리는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좋은 계절에 만났다.
그날은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압구정 CGV 앞에서 SG 오빠를 기다렸다. 하늘하늘한 흰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혹시 하늘님?”
“네…“
그 이후로 쭉 SG 오빠는 나를 이름 대신 하늘이라고 불렀다. 오빠가 애칭을 불러줄 때마다 하늘을 나는 듯 행복했다.
내 우산을 접고 SG 오빠와 함께 쓴 우산 아래에서 밀착된 우리 사이에는 긴장감과 떨림이 있었다. 극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영화를 봤다. 오빠는 팝콘을 몇 개 집어 들어내 입에 가져다주었고 나는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오빠가 주는 팝콘을 떨리는 입술로 받아들였다. 순간 몸의 구석구석이 찌릿하며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인생 처음 최고치의 도파민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짜릿한 흥분감에 영화에는 집중할 수 없었다. 온 신경은 팝콘과 오빠의 손가락이었다. 나도 용기를 내어 팝콘을 집어 SG 오빠의 입에 넣어주었다. 내 손가락이 살짝 SG 오빠의 혀에 닿았다. 오빠도 내 몸처럼 찌릿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몸이 반응하는 호감의 기류가 통했는지 짧은 첫 영화관 데이트가 끝나고 다음 약속을 잡았다.
SG 오빠는 6살 많은 Y대 복학생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호리호리한 몸매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 얼굴은 긴 편으로 말상이었는데 코가 조금 큰 편이었다. 살짝 휜 콧대는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SG 오빠의 꿈은 미국의 국제연합 UN 사무국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글로벌한 꿈을 가진 인재라 그런지 주변의 친구들은 S대 또는 외국 친구들이 많았다. 첫 만남부터 급속도로 SG 오빠에게 빠져들었다. 자연스럽고 능숙한 태도와 매너가 풋내기인 나에게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SG 오빠와 같이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나도 영어공부를 하고 싶어 졌고 그때부터 내가 영어에 발을 들이게 된 시작이 되기도 했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거부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왜냐하면, 나의 집안 사정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나에게 실망할 것으로 생각했고 그 마음은 너무나도 단단하고 확고해서 사실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이 만남의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혼을 하지 않으면 결국 끝인 거니까. 이 연애의 결말은 사실 정해져 있었다.
나는 언제나 오빠가 보고 싶었다. 평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오빠가 나의 첫 연애 상대였고 첫 남자였다. 내 모든 것을 주었다고 생각하니 촌스럽지만, 이 남자와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순진했다.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어린아이처럼 징징거렸다.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늘 테스트했다. 조금만 서운해도 이별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얄미운 말과 함께 극단적으로 행동했다. 모두 사랑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서투른 첫사랑은 나를 자꾸만 삐딱하게 만들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나는 오빠에게 진담 반 농담 반처럼
‘우리 50 일만 사귈까?’라고 툭 내뱉었다.
진심이기도 했고 거짓이기도 했다. SG 오빠에게 점점 빠져들까 봐 무섭고 걱정도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가 매달려주길 바라기도 했다.
체념한 듯 SG 오빠는 ‘그래, 그러자’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바탕 싸운 것도 아니고 너무 쿨한 우리 둘의 이상한 약속은 각자의 마음속에 생채기처럼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다시 달콤한 연인으로 돌아갔다. 짧은 경주 여행도 가고 그의 친구들과도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 학생에게는 부담이었을 값비싼 목걸이도 선물로 받았다.
가끔 너무 행복할 때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나는 이별의 D-day를 무의식 중에 세고 있었고 그날은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SG 오빠를 향한 내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고 커진 양만큼 슬퍼졌다.
사소한 일로 오빠에게 화를 냈다. 항상 남발하던 이별을 또 말해버렸다. 결국, 우린 그렇게 50일의 연애를 하고 헤어졌다.
이별에 대한 슬픔으로 모든 일상은 무너졌지만, 어차피 가난한 나의 사정과 우리 집안 사정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되니 한편으로는 위안으로 삼을 지푸라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푸라기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집은 분명 힘도 없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집인데, 나는 그 집을 지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SG 오빠가 미친 듯이 보고 싶을 때면 그의 집 근처 전봇대나 골목 어귀에 숨어 먼발치에서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서성이던 내 모습. 실연의 아픔으로 좋아하는 학교 앞 참치 김치찌개를 도저히 입으로 넣을 수 없었던 놀라운 나의 식욕감퇴의 나날들. 집에만 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워 울었던 시간
스스로 만든 무덤 안에서 몸부림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꼴이 되었다.
내가 만든 지푸라기 집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실연의 아픔을 6개월 이상 겪고 난 후, 내 눈은 다시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오기와 열정으로 똘똘 뭉쳐서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멋진 내가 되어 SG 오빠가 나를 놓친 걸 후회하게 해야지.
나는 영어 프리토킹 스터디 모임에 가입 신청을 했다. 초급으로 가입해서 꾸준히 하다 보니 리더가 되기도 했다. 영어공부를 꾸준히 한 덕분에(방학 단기 어학연수도 도움이 되었다.) 영어면접을 통과하여 수입브랜드 MD로 취직까지 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짧은 연애들도 결국 끝이 보이는 연애를 했지만, 나의 매력은 사실 배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가진 게 없어도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그 노력의 모습이 가장 빛났을 것이다.
내적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데 온갖 신경을 쓰고 살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 모른다.
나는 50일 동안 짧은 인생 가르침을 얻고 꿋꿋하게 나아갔다. 소나기 같던 나의 첫사랑은 영어공부에 대한 자극을 주었고 소녀에서 여자로 만들어주었다.
잠시 방황했던 시절도 성장의 한 단계였다. 곧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는 고치 안의 애벌레처럼, 마치 내 서랍 속 깊은 곳에 방치되어 있는 SG 오빠에게 받은 목걸이의 보석처럼….
스무 살, 나는 그렇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잠시 빛을 잃었다가 또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