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애 이야기
호수가 어마어마하게 많기로 유명한 미국 미네소타주의 차 번호판에는 ‘land of 10,000 lakes(일만 호수의 땅)’라고 적혀있다.
SG 오빠와 헤어지고 한동안 정체기를 갖다가 만렙의 의지가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한 오후의 어느 날이었다.
압구정 2번 출구로 나와 100미터쯤 걸으니 다이렉트 잉글리시 간판이 보였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등록을 했다. 한국인 선생님과 30분 정도 수업을 하고 나서 원어민 선생님과 30분을 수업하는 방식이었고 금액은 한 달에 30만 원이 넘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에게는 큰돈이었기에 아르바이트는 필수로 병행해야 했다.
마침 길 건너 2층에 있는 <Cass&Rock>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미국 번호판들과 빈티지한 소품들이 벽과 선반에 무질서하지만 멋스럽게 걸려있는 작은 웨스턴 바였다. 유광 표면의 낡은 진갈색 테이블과 의자들은 클래식한 느낌도 풍겼다. 가본 적은 없었지만 미국 중서부의 오래된 펍이 이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해서 그런지 Cass&Rock에 출근할 때면 룰루랄라 기대감을 안고 갔다. 크고 작은 와팬이 달린 남색 유니폼과 모자까지 갖추고 나면 10초 만에 미국에 도착해 있었다.
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팝 음악이 흘러나오는 주크박스였다. 미국 드라마에서나 봤던 주크박스에 손님들은 동전을 넣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다. 나는 직원이라 무제한으로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 당시 자주 들었던 내 최애 곡은 Santana의 Smooth였다. 강렬한 기타 연주와 이국적인 사운드가 가게 안에 울려 퍼지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미국은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불안하고 불편한 한국 생활과는 달리 온몸에 전율이 흐를 만큼 짜릿하고 신선한 곳이었다. 동시에 편안하고 행복한 곳. 나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보는 미국 사람들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응접실도 있고 방도 많았다. 누구나 마당이 있고 탁 트인 도로와 넓은 하늘은 숨 쉴 공간을 제공해 주는 나라임이 틀림없었다. 화면 속의 그들은 최소한 집 걱정은 없이 넓은 집에서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미국의 가난은 한국의 가난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유해 보였다.
나의 담당 원어민 선생님인 Brian을 <Cass&Rock>으로 초대한 건 내가 다이렉트 잉글리시를 수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미네소타에서 온 Brian은 오른쪽 구석 벽면에 붙은 미네소타 자동차 번호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그곳은 Brian의 전용 좌석이 되었다. Cass&rock 직원인 나의 권한으로 그가 좋아하는 Bon Jovi 음악을 자주 틀어주었다. brian은 내 덕분에 많은 동전을 아낄 수 있었다.
Brian과 처음 카페에서 데이트했던 날, 노트를 펼쳐놓고 어설픈 영어로 아는 단어를 적어가며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 나누었던 게 생각난다. 꽁냥꽁냥 장난치며 호감을 느끼며 만남의 횟수를 늘렸다.
180이 넘는 키에 운동 안 하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던 그는 목 늘어난 본조비 티셔츠를 정말 좋아했다. 양말에 샌들을 신는 촌스러운 패션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해맑고 귀여운 얼굴의 brain의 외모가 촌스러운 패션마저 덮어주었다. 톤 다운된 민트 셔츠를 입었을 땐 또 다른 사람 같았다. 옷차림에 따라 비호감과 호감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어느새 콩깍지가 씌었다. 내가 잘하고 싶은 영어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고(당연하지만) 내가 동경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그에게 점점 더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올리브그린에 가까운 금발 머리를 마음껏 만질 수 있다는 것도 최고로 짜릿함 중 하나였다.
그가 가끔 내 손등을 '탁' 치며 미간을 찌푸리던 때도 있었는데, 예고 없는 들이댐 같은 거였다. 예를 들면 그가 서툴지만, 열심히 젓가락질하고 있는데 끝까지 해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말도 없이 그의 손을 붙잡고 교정해 주려 할 때 같은 어떤 ‘개인 영역의 침범’ 같은 거였다. 개인적, 문화적 차이가 조금 있다고 느끼긴 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Brian과 함께 미국에서 사는 삶을 종종 상상하곤 했다.
대낮에 불을 켜지 않아도 햇빛이 집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오후의 어느 날 허리에 에이프런을 두르고 가족들을 위해 쿠키를 굽고 backyard라고 부르는 뒤뜰에서 Brian이 바비큐를 굽고 있는다. Brian의 푸른 눈과 나의 탱글탱글하고 깨끗한 피부를 골고루 닮은 인형같이 예쁜 아이들이 깔깔깔 웃으며 집 안팎을 오가며 뛰어오는 상상.
미국으로 가면 더 이상 좁은 집에서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겠지? 매일 지겹게 싸우는 부모님과도 거리를 둘 수 있겠지? 그리고 못난 나의 존재와 태생, 배경 모두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미국은 내 꿈을 실현시켜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수개월 후 나를 포함한 이상적인 상상 속 가족사진은 유리 조각 깨지듯 바닥에 날카롭게 쪼개져 흩어진다. 영어학원과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Brian이 그의 고향인 미네소타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우린 아직 해야 할 일들이 각자 있었고 앞길이 창창했기에 결혼 같은 미래의 약속 따윈 하지 않았다.
남겨진 사람이 떠나는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이별을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Brian이 떠나고 절실히 느꼈다. 가는 곳곳마다 압구정은 온통 Brian과의 추억이 Cass&Rock의 벽에 붙은 번호판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이제 더는 그 번호판들은 전혀 멋스럽지 않았고 지저분해 보였다.
나는 그와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끊어질 듯 말 듯 한 동아줄을 잡고 만렙의 의지를 불태웠다.
미네소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리 사이를 다시금 재정비하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지도 모를 환상의 나라 미국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 모든 것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미국은 어떤 곳인지 Brian과의 인연은 정말 끝인지 그리고 영어공부를 위해.
심장이 매일매일 쪼그라들고 있었다.
비자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2000년대 초에는 미국에 가려면 비자 발급이 까다로웠다. 지금처럼 ESTA 비자가 없던 시절이라 미국에 가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우리 집은 가진 게 없어 친척들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다. 제일 만만한 셋째 고모부에게 연락했다. 보증 같은 것을 해야 했기에 걱정과 의심스러운 눈빛이 역력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고모와 고모부를 설득해서 비자 발급의 절차들을 강행했다.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다.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절박하게 기다렸다. 기다리던 끝에 결국 미국 비자를 받게 되었다.
그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단연코 기억에 남는 희열의 순간이다.
어학연수라는 명목으로 Brian을 본다는 희망찬 흑심을 품고 일만 개 호수의 땅, 미네소타행 비행기를 탔다. 다시 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건지 철이 없었던 건지 모르지만 나는 밥을 믿고 숙소도 예약하지 않은 채 미국 달러 400불과 언니의 신용카드만 믿고 갔다. 첫 비행기에 경유까지 해서 가느라 황당하고 어리바리한 에피소드가 많았지만 그 당시 두려움이라고는 1도 없었다. 오직 희망과 기대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학교 등록금만 내고 다른 건 전혀 고민하지 않고 Brian만 믿고 온 나는 Brian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음을 직감했다. 친절했지만 보이지 않는 선을 감지했다. 나는 Brian의 하우스메이트이자 집주인인 Eric을 소개받았다. Brian도 임시로 그곳에 거주 중이었고 남은 방 하나에 당당히 무상 취식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뻔뻔하고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Brian은 많은 곳을 구경시켜 주었고 경험하게 해 주었다. Root beer를 처음 먹어보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크리스피도넛을 처음 먹어보았다. 미시시피강을 따라 배를 타고 투어도 하고 바다같이 넓은 수페리어호가 잇는 Duluth도 데려가 주었다. 그러나 다정한 Tour guide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우리의 관계가 다시 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지만, 미국에 가보니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책임감이라고 느꼈을 일련의 투어가이드의 임무를 마치고 Brian은 공부를 위해 계획에 있던 일정대로 애리조나주로 떠났다.
Eric과 나만 덩그러니 큰 집에 남게 되었다. 두툼한 어깨가 인상적이고 수줍게 웃는 모습과 웃을 때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 Eric은 그의 덩치답게 빨간색 쉐보레 트럭을 몰고 Honeywell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Eric과 단둘이 남은 그 집에서 미국의 생활을 편안하게 즐겨보려고 했다.
Eric은 매우 세심하게 나를 잘 보살펴 주었다. 학교까지 데려다주거나 데리러 오기도 하고 주말엔 보트를 타고 호수에서 낚시를 했다. 잔잔한 호수의 배 위에서 Eric이 만들어준 치즈 햄버거는 당연 그동안 먹었던 햄버거 중에서 최고였다. Eric이 예약한 시카고 여행, 최고급 호텔과 환상적인 불꽃놀이는 평생 기억에 남는 추억이다.
Eric의 집은 내가 상상하던 미국의 가정집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의 개수는 당연히 많았고 넓은 응접실과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는 뒤뜰이 있었다. 성인 두어 명이 누워 잠을 자도 충분한 넓은 주방이 있었다. 세탁실이 따로 있었고 수영장에서는 어느 때고 수영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내심 그날을 기다렸다.
Eric에 집에서 편안하게 대접해 주는 미국의 생활은 평온했지만 나는 어느 곳에 있든 불안한 존재인 것만은 확실했다. Brian에게 미련이 남았던 것도 아니지만 모든 걸 뒤로하고 미국으로 올 만큼 100%로 Eric에게 빠지지도 않았다. 마음이 딱 그랬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낌새가 느껴지자 상대에게서 더 멀어지는 특유의 연애 스타일이 발동되었다.
Eric을 떠나며 남겨진 그의 슬픔을 알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또 새로운 만남을 가지고 싶은 희망을 품었다.
아침부터 돌아갈 채비를 하느라 바쁜 나와는 달리 커다란 산 같은 Eric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 Eric의 파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비행기 안에서 나도 펑펑 울었다. 눈물을 닦고 잠을 청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계 미국인 Teddy를 만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