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관점 인정하기

대추 한 알이 우주입니다

by 인문학 이야기꾼

내 관점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인정하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나아가 사물을 주체로 보고 사물의 입장에서, 사물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장석주 시인(1955년~ )의 ‘대추 한 알’이란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장석주, ‘대추 한 알’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하찮은 대추일지 모릅니다. 작아서 먹을 것도 별로 없고 볼품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대추의 관점으로 보면 지난 여름의 태풍도 몇 개 견뎌내고, 지독한 무더위와 땡볕도 받아들였습니다. 벼락과 천둥은 물론 무서리도 이겨냈습니다. 초승달마저 진 어둠의 외로움을 별을 벗삼아 떨쳐냈습니다. 작은 대추 한 알이지만 인간이 겪어야 할 온갖 풍상을 견디고 이기고 품어 비로소 붉은 대추 한 알이 되었습니다. 덩치가 작다고, 먹을 것이 없다고 무시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이지요. 대추의 관점으로 인간을 보면 인간은 저 혼자 붉어질 리도 없고, 저 혼자 둥글어질 리도 없습니다. 태풍과 천둥에 놀라고 땡볕을 보면 피하기 바쁘죠. 그렇다고 대추가 인간을 의존적이고 인내심이 없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삼국지』에는 무수한 영웅들이 무수한 전투에 등장합니다. 유비나 조조와 같은 영웅들의 죽음은 소상히 다룹니다. 그러나 이름 모를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은 아무런 사연 없이 ‘죽었다’로 처리합니다. 병사들은 한 가정의 아버지로, 아들로, 남편으로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관계를 생각하면 장군의 삶이나 병사의 삶이나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장군을 주체로 볼 수 있지만 병사가 삶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대추도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병사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싸웠을까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랬을까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 충실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병사 개인을 주체로 본다면 국가가 오히려 개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수많은 병사 중에서 어느 한 병사를 주인공으로 『삼국지』를 쓰면 색다른 소설이 되겠지요.

『삼국지』의 관우 이야기도 하겠습니다. 관우가 죽은 후 혼령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 떠돕니다. 유비 형님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원통하게 죽었기 때문이죠. 이때 관우와 동향인 보정이라는 스님이 나타나 관우에게 깨우침을 줍니다. 유비의 인의(仁義)도 조조의 관점에서 보면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관우의 관점으로 보면 유비가 최상의 지도자이겠지만 조조의 부하의 관점으로 보면 조조가 최상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깨달음을 얻은 관우의 혼령을 편하게 저승으로 갑니다.


『삼국유사』에 ‘손순매아(孫順埋兒)’라는 설화가 있습니다. ‘손순이라는 사람이 아이를 묻다’라는 뜻이지요. 신라시대 이야기입니다. 손순 부부는 가난하여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아이가 할머니 밥을 빼앗아 먹으므로 부부가 의논하여 아이를 파묻기로 합니다. 아이를 묻기 위해 산에 가서 땅을 파니 석종이 나왔습니다. 그 종을 치니 아름다운 소리가 멀리 퍼져 임금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죠. 임금이 종소리의 근원을 알고 그 집에 식량을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아이는 살아왔지만 그것은 결과론적 이야기일 뿐입니다. 땅을 파는 순간 아이는 죽은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이가 죽었을까요? 효(孝)라는 가치가 아이를 죽인 것입니다. 손순 부부가 아이를 묻기로 한 것은 진심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효’라는 시대적 가치관이 손순 부부를 압박하여 원치 않았던 행동을 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의 할머니는 손자가 밥을 먹는 것이 자신이 밥을 먹는 것보다 더 배가 불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이도 할머니의 밥을 뺏아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함께 먹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할머니와 아이의 관점으로 보면 아이가 죽을 일은 아닙니다.

시대적 가치관을 주체로 보지 않고 할머니를, 손순 부부를, 아이를 주체로 보았다면 아이를 묻을 생각은 하지 않았겠죠. 특히 아이를 주체로 보면 아이가 우주입니다. 아이가 밥을 먹는 그 공간이 우주인 셈입니다. 효(孝)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아이에게 우주가 아니지요. 아이의 우주 바깥에 있는 가치관으로 아이의 우주관을 재단해서야 되겠는지요? 안도현 시인(1961년~ )의 ‘우주’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리가 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곳까지가

잠자리의

우주다


잠자리가 바지랑대 끝에 앉아 조는 동안은

잠자리 한 마리가

우주다

-안도현, ‘우주’


우주는 무한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잠자리에게 무한의 공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잠자리의 가능한 행동 반경이 자신의 우주이지요. 바지랑대 끝에 앉아 쉴 수 있다면 그곳이 소중한 공간이자 우주인 셈이지요.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잠자리는 미물이고 주체가 될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잠자리를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잠자리의 생각 저 너머에 있는 어떤 가치 때문에 잠자리가 날아갈 수도 없고 졸 수도 없으면 안 되겠지요. 잠자리 한 마리가 우주이니 잠자리의 사유 능력도 우주적 사유 능력을 지닌 것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도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견문이 좁다고 할 수 있겠으나 개구리의 관점으로 보면 우물 안이 우주이겠지요. 자신의 우주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개구리를 견문이 좁다고, 사유 능력이 모자란다고 비판해서야 되겠습니까? 잠자리의 관점을, 개구리의 관점을 인정해 주어야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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