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가치를 찾기 위한 노력
각주구검(刻舟求劍)은 배에 새겨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편(察今篇)』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거상(巨商) 여불위(呂不韋)가 진시황(秦始皇)의 전국 통일의 일등공신으로 재상이 된 후, 자신과 진나라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유능한 인재 수천명을 모아 저술 및 편찬한 책입니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담은 책이라고 자부하며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빼거나 더할 수 있는 사람에게 천금을 주겠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일화에서 ‘일자천금(一字千金)이 유래되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楚)나라 사람 중에 양자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에 칼이 빠진 그 위치를 배에 표시를 해 두면서 말했다. “여기가 내 칼이 빠진 곳이다.” 배가 목적지어 도착하자 칼자국이 새겨진 곳을 따라서 물속에서 칼을 찾기 시작했다. 배는 이미 이동하여 왔고, 칼은 그 자리에 있거늘 칼 찾기를 이와 같이 하니 그의 행동이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이와 같다. 시대는 이미 달라졌는데 법은 바뀌지 않았으니 이 법으로 다스린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칼을 빠뜨린 위치와 칼을 찾는 위치가 다릅니다. 배는 이미 흘러 현재의 위치에 있고, 칼은 빠뜨린 그 자리에 있으니 현재의 위치에서 칼을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배는 시대의 흐름을, 칼은 제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면 그에 맞게 법과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성어는 ‘미련하고 융통성이 없음’의 사전적 의미를 지닙니다. ‘시대의 변천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 ‘잘못된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의 의미를 함께 지닙니다.
양자강 깊은 물에 칼을 빠뜨렸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요? 그 칼을 찾기 위해 당장 물에 뛰어드는 것은 자칫 목숨도 같이 물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해야 되겠는지요. 그나마 할 수 있는 방법이 칼을 빠뜨렸다는 표시를 해 두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칼을 찾기 위해 물로 뛰어드는 무모함보다, 주저앉아 울면서 체념하기보다 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 아니겠는지요.
칼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칼을 잃어버린 것을 알아도 그것이 가슴 아픈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소중한 칼을 잃어버린 사실을 알고 그것을 찾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강구한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비난을 받아서야 되겠는지요.
김수영 시인은 자유와 정의와 민주의 가치를 시로 형상화한 1960년대 대표적인 참여 시인입니다. ‘사령(死靈)’이라는 시의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하략)
-김수영, ‘사령(死靈)’ 중에서
자유의 가치가 책 속에서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그 가치를 현실 세계에서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의 칼날이 두렵습니다. 책 속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자유의 가치에 그리고 그 가치를 얻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를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그 가치를 얻기 위해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몸은 살아 있지만 영혼이 죽었다[사령(死靈)]고 화자는 자신에게 자조적인 비탄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자유의 가치가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안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체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의 영혼이 죽어 있다고 자신을 조롱하는 화자는 어느 행동가보다 위대해 보입니다.
양자강 드넓은 강에 빠뜨린 칼을 자유의 가치라고 생각해 보면 칼을 잃어버린 사실을 알고 칼을 찾기 위해 배에 표시를 해 둘 정도의 사람이라면, 칼을 잃어버린 사실조차도 모르고 안다고 하더라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깨어있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을 융통성이 없느니, 어리석은 사람이라느니 비난해서야 되겠는지요. 비록 칼을 잃어버린 그 자리에서 바로 물에 뛰어들어 칼을 찾지는 못하더라도 칼을 찾기 위해 수천 년 후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애쓴 그 사나이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야 되지 않겠는지요.
시대가 변했다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과거의 잘잘못을 다 덮고 갈 수는 없습니다. 배가 아무리 빠른 속도가 전진하더라도 칼을 빠뜨린 것은 사실이고 그 사실을 완전히 덮고 가기보다 뱃전에 표시라도 해 두어야 강바닥을 탐지하는 기술이 더 발달하는 시대가 왔을 때 그 뱃길을 더듬어 잃어버린 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칼이 소중한 만큼 칼을 찾으려는 노력 또한 소중한 일입니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옛날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거기다 새로운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전(古典)’이란 이름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칼이 시대를 초월한 소중한 가치라면 그 칼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니 각주구검은 ‘시대의 변천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 더해, ‘소중한 가치를 찾기 위한 노력’이라는 의미를 사전에 추가해야 되지 않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