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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이야기꾼 Apr 15. 2024

관포지교(管鮑之交)

-인간관계의 대명사

  관포지교(管鮑之交)는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친구 사이의 깊은 우정을 말합니다. 이 성어의 역시 유래를 알아야 그 이면적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어의 유래가 되는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 <관안열전(管晏列傳)>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교류하며 우정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대등하게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라 포숙아가 관중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이입니다. 같이 장사를 해서 이익이 남으면 항상 관중이 더 많이 가져갑니다. 그래도 포숙아는 ‘관중은 쓸 곳이 많다’고 관중을 챙깁니다. 전투에서 관중이 도망을 가도 ‘관중은 노모를 모셔야 된다’고 두둔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제(齊)나라 희공(僖公)의 둘째 아들(규)과 셋째 아들(소백)의 스승이 됩니다. 제나라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관중은 공자(公子) 규와, 포숙아는 공자(公子) 소백과 각각 다른 나라로 망명합니다. 우여곡절 속에서 제나라 왕이 죽자 제나라는 무주공산이 됩니다. 규와 소백 중에서 먼저 제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제나라 왕이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친구였던 관중과 포숙아는 공교롭게도 제나라 왕위 쟁탈전에 정적(政敵)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관중은 정적이 된 공자 소백을 향해 독화살을 날립니다. 독화살이 제대로 맞았다면 관포지교도 없고 패자 제환공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 독화살을 소백의 허리띠에서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독화살을 맞은 척했던 소백의 연기는 관중의 여유를 불렀고 결국 포숙아와 소백이 먼제 제나라에 입성하게 됩니다.

  포숙아가 모시던 공자(公子) 소백(小白)이 제나라 왕이 되자, 정적이었던 공자(公子) 규(糾)는 자결하고 공자 규를 모시던 관중도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포숙아는 제환공(齊桓公)이 된 공자 소백에게 관중을 재상으로 추천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관중의 아랫자리에 있게 됩니다. 자기를 독화살로 쏘아 죽이려고 했던 관중을 재상으로 삼은 환공의 도량이 참 넓어 보입니다. 관중이 재상이 되어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방면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고 제환공은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霸者)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관포지교의 전반부의 이야기입니다.    

 

  관중과 포숙아의 후반부 이야기는 『‘장자(莊子)』가 전해줍니다. 안희진 교수의 『장자 21세기와 소통하다』라는 책의 내용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재상 관중의 병증이 심합니다. 관중의 후임자가 걱정이 된 제환공이 관중에게 후임자를 묻습니다. 포숙아를 염두에 두고 있던 환공에게 관중은 ‘포숙아는 안 된다’고 합니다. 포숙아는 너무 청렴하고 훌륭한 사람이라,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경멸하기 때문에 환공에게도 죄를 짓는 일을 할 것이라고 하죠.

  관중은 ‘나를 낳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고 말하며 포숙아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관중은 왜 포숙아를 추천하지 않았을까요? 관중의 생각을 장자(莊子)의 말을 통해 표현해 보겠습니다. 깨끗함이 드러나는 사람은 진정 깨끗한 사람이 아닙니다. 깨끗함에 집착하는 사람일 뿐이죠. 진짜 깨끗한 사람은 자신이 깨끗하다는 생각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포숙아는 자신의 깨끗함을 잣대로 남을 평가하여 자신의 깨끗함에 미치지 못한 사람을 용인하지 못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관중도 포숙아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해야 하나 관중은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환공을 먼저 생각했나 봅니다. 친구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관중의 의도와 달리 제환공은 인(人)의 장막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제나라도 한동안 비틀거려야만 했습니다. 

     

  최상의 인간관계가 맺어지기 위해서는 주고받는 것이 기욺이 없어야 하죠. 그러나 한쪽으로 기울더라도 다른 쪽의 무한한 인내나 희생이 뒷받침된다면 역시 최상의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관중이 포숙아를 아무리 이성적 잣대로 재단하더라도 포숙아는 온몸으로 관중을 감싸 안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관중은 포숙아의 덕으로 이익을 누렸으며, 사형집행의 순간에 관중은 오히려 재상이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포숙아가 재상 자리마저 관중에게 양보했기 때문이죠. 포숙아는 관중에게 어리숙할 정도로 베풉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이 둘의 관계는 우정보다는 한쪽의 희생으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희생할 생각이 앞서야 하고, 그것이 힘들다면 이익을 볼 생각을 거두어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친구가, 아내가, 아들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친구에게, 아내에게,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의 대명사인 관포지교가 자연스럽게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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