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연저지인(吮疽之仁)은 ‘장수가 병사의 종기를 직접 빨아 낫게 하는 어진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입니다. 여느 고사성어가 그렇듯이 이 성어도 유래를 알아야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기(吳起)’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군단장쯤 되는 직책에 있을 때 자신의 병사 중에 등에 종기를 앓고 있는 자가 있었는데 오기 장군이 자신의 입으로 그 종기를 빨아 낫게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입으로 종기를 빨아주는 어진 마음’이라는 뜻의 ‘연저지인(吮疽之仁)’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오기 장군의 이러한 행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려는 자신의 이익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병사의 종기를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근거로 종기가 난 병사의 어머니를 등장시킵니다. 군단장이 일개 병사의 종기를 빨아주었다는 사건은 큰 뉴스가 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갑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합니다. 졸병의 종기를 장군이 빨아 낫게 해 주었는데 왜 우느냐고 누군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왕년에 오기 장군께서 그 병사의 아버지의 고름을 빨아 낫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싸움에 나가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이 아이의 고름을 빨아주었으니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아이도 틀림없이 전장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을 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병사의 어머니의 관점으로 보면 오기 장군은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병사의 고름을 빨아준 것이 됩니다. 병사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이익이 먼저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논리로 본다면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는 이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맹자(孟子)-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아무리 어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만든 화살이 사람을 상하게 하기를 바라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어질지 않더라도 자신이 만든 갑옷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 무탈하기를 빌어주는 무당과 관(棺)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관쟁이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러니 직업을 택할 때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화살이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방패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하여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무조건 악하다고 할 수 없고, 방패를 만드는 사람을 무조건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화살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을 악인으로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무당을 선인으로 추앙할 수 없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병사의 고름을 빨아준 이 사건 하나만으로 오기 장군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오기 장군은 원래 위(衛)나라 사람으로 증자(曾子)의 문하생이 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공부에 전념하겠다며 가지 않아 파문(破門)을 당합니다. 이웃 노(魯)나라로 가서 노나라 군주를 섬기고 제(齊)나라 사람을 아내로 맞습니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에서는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대신들은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오기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으로 의심합니다. 이에 오기는 자기 아내를 죽여 자신이 제나라 편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기는 장군으로 임명되고 이 전투에서 크게 이기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병사의 종기 사건이 겹쳐지면서 오기가 병사의 종기를 빨아준 것은 자신의 출세를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게 된 겁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 아내를 죽인 사람이 병사의 고름을 빨아주었으니 그 행위가 곱게 보일 리가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오기 장군의 이전 행적은 버려두고 ‘연저(吮疽)’한 행위에만 초점을 두면 그 행위는 아무나 하기 어려운 선행입니다. 그 행위의 너머에 있는 출세라는 목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행위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지금의 그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느냐 손해를 끼치느냐가 됩니다. 진정성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선함을 목적으로 하든 이익을 목적으로 하든 지금 당장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면 선행으로 보고 권장할 만한 일로 볼 수 있습니다.
복효근 시인의 ‘우산이 좁아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각색하면 이렇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좁은 우산이지만 두 사람이 쓰고 갑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내 왼쪽 어깨는 젖었고 옆에 있는 사람의 어깨는 뽀송뽀송할 때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산을 씌워주는 행위가 사랑을 얻기 위한 복선을 깔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행위는 선행입니다. 이런 행위가 모두에게로 확산된다면 우리 사회는 배려로 넘치는 사회가 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선한 행위를 폄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선을 깔고 있다느니,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수단 자체가 정당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 행위는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오기 장군은 출세욕이 강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장군이 졸병과 함께 숙식을 하고, 장군이 졸병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종기를 직접 빠는 행위는 부상자를 짐으로 여길 수 있는 현실에서, 그리고 갑질이 심심찮게 터져나오는 현실에서, 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선행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