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강우>
닭이 알을 3주 정도 품고 있으면 알은 병아리로 부화합니다. 이 기간 어미닭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온갖 정성으로 알을 품습니다. 때가 되면 병아리는 스스로 알을 깨고 세상으로 머리를 내밉니다. 최초로 접하게 되는 낯선 세계에서 살아갈 힘을 어미닭의 포근하고 따뜻한 품속에서 얻습니다. 어미닭의 보살핌으로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고 어미닭의 품속에서 잠을 잡니다. 연약하기만 한 닭도 어미닭이 되는 순간 용맹한 모성애를 발휘합니다. 매와 맞짱도 마다하지 않는 용맹함 속에 병아리의 천진난만함이 형성되는 것이겠지요. 어미닭과 떨어진 병아리는 여간한 정성으로 키우기 쉽지 않습니다. 어미닭만큼의 접촉 위안이 있어야 병아리를 밝고 천진난만하게 키울 수 있겠지요.
김남조 시인의 ‘설일’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제목의 의미는 ‘눈 오는 설날’ 정도가 됩니다. 이 작품의 1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김남조, <설일> 중에서
겨울나무와 겨울바람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존재입니다. 겨울나무는 그 앙상함으로 인한 외로움을 달랠 수 없고, 겨울바람은 그 차가움으로 인한 외로움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나무 가지 끝에 겨울바람이 머물 수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둘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처럼 접촉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신기한 존재입니다.
시묘살이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식이 3년 동안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거주하면서 묘소를 돌보는 일을 말합니다. 시묘살이는 효를 중시하는 유학의 이념을 국시로 하는 조선 사대부들에 의해 유행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최소 3년은 부모의 헌신적인 보호와 보살핌을 받았기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최소 3년은 부모님 곁에서 보살펴야 한다는 논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사망하자 그의 제자들이 3년상을 기본으로 시묘살이를 했고, 제자 중에 자공(子貢)은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공자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아마 공자의 학문적 보살핌에 대한 보답이 3년, 6년의 시묘살이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런 공자 시대의 사상이 조선 사대부들에게 유행된 것이지요. 이런 시묘살이도 접촉 위안의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묘소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접촉 위안이 된다고 본 것이지요. 이들이 심리학적 용어로서 접촉 위안은 몰라도 인간적인 도리로서 접촉 위안은 알았던 듯싶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강우(降雨)’라는 시도 접촉 위안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한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먼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 한평생 접촉 위안을 주던 대상을 잃은 슬픔의 눈물이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립니다. 마치 퍼붓는 빗발, 강우(降雨)처럼 눈물이 흐릅니다.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 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것이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김춘수, <강우(降雨)>
아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밥상은 차려져 있는데 아내가 없습니다. 큰 소리로 아내를 불러봅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로 되돌아올 뿐입니다. 아내가 평소에 옆구리 담괴가 있어 자주 눕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곳저곳 아내를 찾아 봅니다. 밖을 기웃거리며 아내를 찾습니다. 세차게 비만 퍼부을 뿐 아내는 보이지 않습니다.
60년을 접촉 위안을 받으며 살아온 아내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하니 밥상은 있는데 아내가 없습니다. 밥은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아내를 찾습니다. 집안에는 없습니다. 밖에 있나 문을 열어봅니다. 앞을 못 볼 정도의 빗발이 퍼붓습니다. 60년이나 함께 했던 아내의 부재로 인한 슬픔의 눈물이 빗발로 퍼붓는 것이겠지요. 아내와 함께 했던 시간과 접촉 위안의 깊이만큼이나 깊고 진한 눈물이 강우로 흐릅니다. 퍼붓는 빗물만큼의 슬픔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엄마를 걱정하는 한편 화자 스스로도 접촉 위안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시입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화자는 초등학교 2~3학년 정도 되어 보입니다. 엄마는 시장에 열무를 팔러 갔습니다. 열무 삼십 단을 다 팔아야 생계가 유지됩니다. 밖에는 어둠과 함께 비까지 내리는데 엄마는 오지 않습니다. 그런 엄마를 어린 화자가 걱정을 합니다. ‘빗소리’는 엄마의 귀가를 어렵게 만들어 어린 화자의 걱정을 심화시킵니다. 화자가 엄마를 걱정하는 이면에는 엄마로부터 접촉 위안을 받지 못해서 생겨난 화자의 무섭고 외로운 정서가 녹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빗소리’는 홀로 견뎌야 하는 화자의 외로움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다는 것은 접촉 위안을 받지 못한 화자의 인식의 투영이고, 엄마가 없는 방은 항상 차갑고 시린 ‘윗목’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가난을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고단했던 삶과 함께 접촉 위안을 받지 못했던 화자의 시린 기억이 뜨거운 눈물을 불러옵니다.
‘얼싸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팔을 벌리어 껴안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쁨과 감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감추지 못할 때 얻는 위안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포옹(抱擁)’이란 말도 껴안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시 감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남을 아량으로 너그럽게 품어주는 경우도 포옹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자칫 서로에게 위안이 되지 않고 일방적인 위로를 위해 포옹을 서슴지 않는 경우 오히려 상대에게 아픔을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