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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이야기꾼 Nov 19. 2024

행복을 위한 <닻 내림 효과>

  닻을 내린 배는 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닻을 내린 장소보다 더 안전하고 고요한 곳이 있다면 자리를 옮겨 닻을 내리는 것이 배의 안전에 유리한 것처럼 처음 내린 결정보다 더 좋은 방안이 있으면 처음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용기이자 행복의 길입니다. 내 생각만을 고집하기보다 내 생각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으면 그 생각을 슬그머니 내 생각으로 삼으면 됩니다. 처음 닻을 내린 장소만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처음 생각만을 고집하지 않는 유연함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송강 정철(1536~1594)은 정치적으로는 많은 부침(浮沈)이 있었으나 문학적으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관동별곡’의 첫 부분은 닻을 내린 장소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으면 한달음에 더 좋은 장소로 이동하는 유연함은 보이고 있습니다. 관동별곡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關관東동 八팔百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다.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延연秋츄門문 드리다라 慶경會회南남門문 라보며, 

      연추문 달려들어가 경회루 남문 바라보며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 셧다.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이 앞에 서있구나

            -정철, <관동별곡(關東別曲)> 중에서     


  ‘강호(江湖)’는 강과 호수로 자연을 뜻합니다. ‘강호에 병이 깊’었다는 것은 자연을 너무 좋아해서 병이 날 정도라는 뜻입니다. 죽림은 대나무 숲으로 역시 자연을 뜻합니다. 그러니 1행은 병이 날 정도로 자연이 좋아 자연에 머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얼핏 보면 벼슬보다 자연이 좋아 자연 속에 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즉 자연에 닻을 내렸다고 선언했습니다. 2행에서 ‘관동 팔백리’는 강원도 지방을 말하고 ‘방면을 맡기다’는 것은 관찰사 직분을 맡기다는 의미입니다. 즉, 2행은 임금께서 화자에게 강원도 관찰사(도지사) 직분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자연이 너무 좋아 병이 날 지경이라면 강원도 지방의 관찰사 임무를 맡기더라도 고사하고 자연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성은에 감격하며 한달음에 경복궁으로 달려가 관찰사 임명장을 받습니다. 

  강호한정에 닻을 내린 듯하지만 속마음은 호시탐탐 벼슬을 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벼슬을 하고 싶은데 정치적인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고향(자연)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 사대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벼슬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자연에 있을 때는 강호한정을 노래하고 벼슬에 나아갔을 때는 훈민을 하고 선정을 베풀겠다고 하는 것이 자존감을 세우는 방법이기도 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벼슬을 향하고 있는데 정치적 힘에 밀려 몸이 고향(자연)에 있을 때 송강의 다른 작품 ‘사미인곡(思美人曲)’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벼슬길에 나아가고 싶다고 애절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체면도 자존감도 없이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존감마저 돌보지 않고 자신을 옥죄면서 벼슬을 탐하는 것보다 벼슬에서 물러난 것이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양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상황의 변화가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황은 그대로이지만 마음을 어떻게 먹고 그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최치원의 시편에서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최치원,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


  화자는 지금 첩첩산중에 있습니다. 계곡의 물소리가 너무나 시끄러워 바로 옆에서 하는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물소리는 소음이 아닙니다.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속세의 소리를 차단해 주는 좋은 소리입니다. 물소리가 세상의 소음을 차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물소리가 세상의 소음을 차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시비와 불공정이 난무하는 세상을 피해 이 산속으로 들어와 닻을 내린 것입니다. 

  당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고운 최치원(857~908)은 신분상 육두품이라 성골이나 진골만이 갈 수 있는 장관직까지는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능력에 비해 낮은(?) 직급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최치원은 세상이 자신의 능력을 버렸다고 한탄하면서 자괴감에 빠지는 대신 자신이 세상을 버렸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찾았습니다.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고(苦)의 상태에 자신을 밀어넣는 대신 세상을 등지고 물소리를 벗삼아 락(樂)의 상태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것이 행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것이 공자가 이야기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상태가 아니겠는지요. 

    

  포목소사(枹木燒死)도 닻 내림 효과로 읽을 수 있는 고사성어입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여러 아들이 후계 구도를 형성하며 왕위 쟁탈전을 벌입니다. 헌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중이(重耳)는 이 쟁탈전에서 밀려 자신을 따르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외 망명 생활을 합니다. 19년 동안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다 합니다. 함께 고생하는 신하 중에 개자추(介子推)라는 신하도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공자 중이(重耳)가 굶주릴 때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여 줍니다. 여기에서 ‘허벅지 살을 베어 주군을 받든다’는 할고봉군(割股奉君)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19년의 우여곡절 끝에 공자 중이는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사람이 춘추오패(春秋五霸)의 한 사람인 진문공(晉文公)입니다. 문공은 자신과 함께 19년의 망명 생활을 한 신하들을 중용합니다.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에 개자추는 소외됩니다. 아마 진문공이 깜빡했던 모양입니다. 소외된 개자추가 집에 와서 어머니께 ‘공을 가로챈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면산(綿山)에 숨어버립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진문공은 개자추가 숨어 있는 면산에 가서 함께 일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개자추는 더 깊이 숨어버립니다. 불을 지르면 나오리라 판단한 진문공은 정말로 산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나무를 끌어안고 불에 타 죽습니다. 이것이 ‘나무를 끌어안고 불에 타 죽다’는 뜻의 ‘포목소사(枹木燒死)’의 유래가 됩니다. 불에 타 죽은 개자추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매년 개자추가 죽은 날은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게 했는데, 이것이 ‘찬 음식을 먹는다’는 뜻의 ‘한식(寒食)’의 유래입니다.

  개자추가 나무를 끌어안고 죽은 이유가 무엇이겠는지요? 개인적으로 보면 할고봉군의 공이 있는 자신을 논공행상에서 제외한 것에 대한 서운함이겠지요. 그러나 그 서운함을 잠시 내려놓고, 진문공이 면산까지 찾아왔을 때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다면 19년의 고통스러운 삶을 보상받을 수도 있었고, 어머니도 여생을 풍성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이고, 진문공도 충신을 논공행상에서 제외했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면산에서 내려가는 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데, 개자추는 개인의 명분에 사로잡혀 여러 사람을 불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특히나 어머니마저 최악의 불행으로 몰아간 개자추의 아집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닻 내림의 장소 설정이 자신의 안위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행불행을 결정한다면 개인의 명분이자 아집은 잠시 접어두는 유연함이 모두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임을 개자추를 통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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