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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솔 Jul 06. 2024

에필로그

한번 깨진 믿음은 회복할 수 없다

갓난애는 불편함을 참지 못해 밤새 운다. 허기져서 밥 달라고 조른다. 기저귀가 젖었으니 갈아 달라고 운다. 아무런 수식 없이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그랬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린 감추는 법을 배웠다. 배고파도 눈치 보며 참는다. 불편해도 견딜 만해 참는다. 잘못인 줄 알면서 모르겠 거니 숨긴다.


나는 동성애자다. 중학교 때는 성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몰랐고 고등학교 때는 같은 반 남학생한테 자꾸 관심을 갖게 되고 도움을 주고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알았다. 나의 성적 취향이 동성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게 옳은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내게 동성애자란 무엇인 지 알려준 사람이 없었고 온라인에서 검색한 일부 부정적인 내용은 두려움만 키웠다.


동성애는 잘 못 된 거 구나.

한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의 성적 정체성을 숨겼다. 하지만 좋아하는 남학생이 말을 걸면 수줍어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나를 자책하며 자살까지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그 힘든 시기를 거치고 환경이 바뀌면 나도 달라질 거라 기대하며 먼 도시의 대학을 지원했다. 세상은 상상 밖으로 크고 다양하며 나의 자책감이 과대망상이나 다름없다는 걸 그곳에서 해결했다.


착하고 다정한 친구들을 만나 긍정적인 기운을 받고 그들의 도움이 있어 동성애자가 나의 잘못이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란 걸 알았다.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지금도 난 여전히 부모님한테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굳이 알아야 할 일도 아니고 어쩌면 충격받고 앓을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웠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고 평생 함께 할 확신이 들 때 부모님께 커밍아웃할 계획이었다.


이번에 만난 친구가 그런 사람이길 기대했다. 우린 별자리가 같고 사는 지역도 같으며 노래 취향도 비슷했다. 몸무게가 비슷하고 키도 비슷하며 둘 다 보조개가 있다. 무엇보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티키타카 할 수 있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우린 사귀기로 했고 둘도 없는 짝꿍이 되었다. 문화생활을 즐기고 함께 스키장에 갔었다. 같은 헤어숍을 다니고 헬스장도 같은 센터에 등록했다. 사귀면서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어도 흔한 커플사이에 상대를 서로 알아가며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 여기며 풀어나갔다. 잘 나가는 커플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내가 몰랐으면 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우리 관계는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는 잘못했다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우리 사이의 믿음은 되돌릴 수 없는 흉터가 남았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해 주겠다고 잘못을 되돌릴 만큼 내게 가장 좋은 남자가 되어 오래 사귀기를 바란다는 말... 장문의 메시지에 진심이 느껴지냐고, 통화하자고 말해도 듣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기로 했다. 그래야 하니까. 이런 경험을 네 번이나 겪어보니 이제는 담담하게 정리할 수 있는 베테랑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발각되어 다행이다

만약 오늘 나한테 들키지 않았다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이 사람이랑 사귀었다면 난 행복했을까? 그는 행복했을까? 둘 다 그러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이미 세 번 비슷한 연애 경험을 겪어 봤으니 난 항상 남자친구의 핸드폰이 궁금했다. 언젠가 몰래 확인하겠지. 그리고 수상한 게 없으면 난 몰래 핸드폰을 덮고 또 다음 불침번을 기다리겠지. 그 사람도 이번에 안 들켰으니 앞으로도 안 들킬 거라 확신하겠지. 연락처에는 내가 알면 안 되는 기록이 점점 늘어나겠지.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 은근 스릴 있어 멈출 수 없겠지. 어차피 안 들키면 되니까.


인스타그램에서 훈글 작가님이 쓴 글을 읽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사실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처음부터 의심이 많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경험 때문에 남을 의심하고 잘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거다. ‘누군가를 믿어봤자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라고. 그때부턴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의심하게 된다. 남들보다 정이 많았을 뿐이고 사람이 좋아 너무 많이 믿었고 그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건 배신과 상처였으니까. 그런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그저 상처가 많아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의심이 많아졌을 뿐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책이 아닌 의심하는 당신의 마음마저 더 큰 확신으로 믿음을 줄 사람이다.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무한한 사람과 끊임없는 믿음으로 당신의 의심마저 확신으로 바꿔줄 사람. 꼭 그런 사람을 만나 데인 상처가 아물고 항상 행복하기를.

https://www.instagram.com/p/CoztGpaPoXD/?igshid=NzAzN2Q1NTE=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의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난 그랬다. 싫어하는 건 여전히 싫고 관심 없는 건 여전히 알고 싶지 않다. 끝으로 그 사람한테 한마디 남기고 싶다.


숨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숨기기를 잘할 것이고 그게 들킨다고 해서 한 순간에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적어도 그 습관을 고친 다음에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으면 좋겠어. 지금 나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된다고 하지만, 넌 몰라. 네가 똑같은 경험을 당해봐야 그때 즘 알겠네. 넌 내게 모욕감을 주었어. 그게 얼마나 아프고 힘들고 치욕적인지 넌 모르겠지.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기로 했어. 네가 누군지 이름은 밝히지 않아도 나랑 사귄 네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해서 우리가 헤어진 걸 알리는 거야. 넌 나랑 사귀면서 내가 쓰레기(渣男)이었다고 놀렸지만, 우리 관계에서는 네가 그 역할했네. 잘 살아라. 전 남자 친구아.


나의 지인들은 이런 내용을 알 권리가 있다. 나중에는 나의 부모님도 이 사실을 알게 될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그때가 되면 다른 말은 필요 없고 딱 이 한마디 듣고 싶다.


우리 아들, 애썼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기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몰래 즐기려는 게 아니라 충격받을까 봐 두렵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신중했다. 적어도 떳떳하고 승승장구하며 행복할 때 알리고 싶었다.


동성애자여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아들 곁에는 좋은 사람이 있구나. 그거면 충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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