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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솔 Jul 03. 2024

네 번째 외도남을 만나다

사람의 촉이란 건 소름 돋는다

보고 싶어. 사랑해. 자기야.

X랑 사귀고 있던 어느 날, 출근길에 문득 이런 문자를 받았다. 살짝 당황스러웠다. 사귄 지 3개월 만에, 먼저 이런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쑥스러운 이유도 있지만, X는 아직 자기가 동성애자가 맞는지 확신하지 않았으니까.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다. 원하는 게 있거나 어떤 일을 겪고 새삼스러운 걸 깨달아 그런 것일 수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주말에 알 게 되었다.


그 문자를 보냈던 전날 밤, X는 전 남자 친구를 자취방에서 재웠다.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는 X의 전 남자 친구가 마침 이태원 클럽에 놀러 왔다가 이른 새벽에 머물 곳이 없어 하룻밤 잘 수 있냐는 부탁에 받아줬다고 한다.


밸런타인데이에 이어 또 한 번 나를 의아하게 한 행동이었다. 이미 헤어진 남자친구를 본인 자취방에서 재운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것도 나랑 사귀고 있는 기간에? 어이가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이 그냥 잠만 잤다고 하는데, 난 그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했다. 내게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지만, 이미 전 남자 친구를 몰래 재웠던 일을 숨겼으니 믿지 말아야 하는 게 진리일 것이다.


게다가 나를 더 충격에 빠뜨린 일은 나랑 사귀면서 랜선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남자랑 서로 나체 사진을 교환하고 영딸까지 했었다고 한다. 너무 화가 나고 말문이 막혀서 당장 헤어지자고 했다.


한국에 유학 온 뒤로 줄곧 지방에서 대학교를 다니다 보니 온라인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연락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장거리 연애만 했었고 가끔 연락하는 온라인 친구랑 욕구를 풀기 위해 종종 영상 통화를 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그랬을 뿐이라고 한다.


오프라인으로 만난 적도 없고 감정적으로 호감이 있어 틈틈이 연락한 것도 아니라서 외도가 아니라고 해명하는 모습에 더 화가 치밀었다. 그냥 잘못했다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본인이 외로워서 가끔 이런 짓을 한 것에 대해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나랑 사귀었던 사람 중에 바람을 피우거나 몰래 바람피우려고 데이팅 앱을 깔았던 남자가 이미 네 번째다.


#뒤통수를 친 남자들이 내게 남긴 것

첫 상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만났던 세 살 어린 동생인데, 평일에는 각자 일상을 보내던 장거리 연애 상대라 주말에만 만났다. 그러던 중, 그의 핸드폰에 깔린 데이팅 앱을 발견하고 다른 남자랑 시간과 장소를 잡고 만나러 갔던 대화 기록을 보고 헤어졌다. 수많은 사람 중, 악질 하나를 만났을 뿐이라고 여겼다.


두 번째 외도남은 방학기간에 귀국했다가 엄마 핑계 대고 다른 도시에 가게 되었다며, 며칠간 엄마랑 있어야 해서 맨날 문자 하기 어려울 거라 했다. 그때 직감했다. 거짓말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2주간 친구 소개로 다른 남자를 만나 여행하며 서로에 대해 사랑이 싹트고 지금까지 잘 사귀고 있다. 대신, 나는 그때 그의 문자를 받고 다른 사람 생겼으면 헤어지자고 먼저 말을 꺼내고 관계를 정리했다. 두 번 정도 겪고 나니 살짝 흔들렸다. 나한테 이런 사람들만 꼬이는 건지,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이 없는 건지.


세 번째 외도남은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이었다(물론 그동안 사귀었던 상대가 대부분 중국인이라 그들도 외국인이지만, 이번에는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다. 여기서 TMI,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나한테 있어 중국이 외국일까, 한국이 외국일까?). 비록 언어적인 불편함이 있지만, 나름 다정하게 잘 사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멋진 머리를 커트해 기념사진을 남겨주려고 그의 핸드폰을 받아 사진을 찍던 중에 파란색 데이팅 앱(Heesay, 지금은 보라색으로 바뀜)을 발견했다. 그는 어플을 통해 잘생긴 남자들에게 적극적으로 DM(그가 보낸 문자는 전부 노골적으로 풋페티시에 관련한 멘트였다)을 보냈다. 다만, 나랑 사귀는 기간에 오프라인으로 만나지는 못한 거 같다.


그리고 이번이 네 번째. 또 바람을 피울 상대를 만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본인이 한 짓이 바람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일 줄이야. 어떤 일을 습관처럼 계속하다 보면 자기합리화하고 나중에는 자기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설득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X의 짠했던 과거와 그럴싸한 설득에 넘어가 주려고 했으나 그동안 겪었던 외도남들의 상처가 다시 드러나 나를 괴롭게 했다. X랑 잘 사귀며 지냈던 날들이 있긴 하나, 믿음이 깨진 관계는 결국 예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속일까? 자기 합리화의 심리학적 이해 (tistory.com)


난 X랑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함께 보냈던 추억을 전부 지웠다. 우리가 사귄 날을 기록하는 카톡 상태도 내렸다. 분명 맛있는 것들을 먹고 예쁜 곳을 다녀왔지만,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모두 사라졌다. 있을 땐 몰랐던 누군가의 빈자리가 꽤나 허전했다.


첫 번째 외도남과 헤어지고 나서 외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HIV 양성이라 사귀던 초기부터 우린 항상 관계를 조심했었고 그를 좋아하는 만큼 HIV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나랑 사귀면서도 딴 남자를 흠모하는 자식이라고 알 게 된 순간 그냥 체념했다.


두 번째 외도남과 헤어지고 나서 혼자 밤늦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 며칠 째 소리 내어 울었다. 워낙 나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말하는 센스도 그렇고 기럭지도 그렇고 외모도 내 스타일이었다. SKY 다니던 유학생이라 공부도 잘하고 사귀는 동안 나한테 꽤 다정했다. 그래서 많이 아쉬웠다.


세 번째 외도남과 헤어지고 나서 그가 내 앞에서 펑펑 울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소중함을 모르고 딴짓을 해서 미안하다고.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누그러들었지만, 헤어질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가 먼저 좋아서 졸졸 따라다니며 사랑 고백했으니 어쩌면 나의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던 걸지도 모른다.


네 번째 외도남과 헤어지고 나서 결심했다. 한동안 연애하지 않겠다고. 아니, 어쩌면 연애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낯선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정을 주고 관계를 이어 가다 언젠가 또 배신당할 까봐 두려워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왜 생기고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게 맞는 일인지 스스로 의심하게 되었다.


동성애자로 살아오면서 늘 동경했다. 마음이 맞는 상대를 만나 평범한 연인들처럼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낼 수 있기를. 하지만, 서로 잘 맞는 상대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고 행복하다가 결국 헤어짐만 반복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이성애자보다 선택의 폭이 작다. 그래서일까, 난 여전히 망망대해를 헤매며 언젠가 만날 반쪽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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