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무딘 건지, 일부러 이러는 건지
좋은 인연이란 어떤 걸까? 같이 있으면 행복해지는 관계? 대화가 끝이지 않는 사이? 욕구를 채워줄 상대? 아니면, 같이 있어 1+1>2의 결과를 이루는 결과?
사랑에 대해 잘 모르던 나이에는 무작정 나를 설레게 하는 상대가 맞는 인연이라 여겼다. 외모적인 부분에 홀려 설렌 사람도 있었고 훈훈한 감정을 끌어올리는 따뜻하고 젠틀한 멘트에 빠졌던 사람도 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연애 상대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재면서 만나게 되었던 거 같다. 일종의 비즈니스적인 연인관계라고 봐도 되겠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에 대한 설렘이 사라졌다. 가슴에 와닿는 행복보다 미래를 고민하고 판단하는 방식에 따라 무난한 일상생활이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설렘과 기대, 새로운 기쁨을 갈망한다. 사소한 선물도 좋고 마음에 두고 챙기는 진정 어린 말 한마디도 좋다. 어쩌면 그런 일 하나로 소소하게 행복을 느끼며 사랑을 이어나가는 게 아닐까?
X랑 사귄 지 79일 되는 날, 같이 밸런타인데이를 보냈다. 거의 한 달 전부터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고 일주일 전에 아웃백을 예약했다.(그는 한국에 온 뒤로 아직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으로 같이 보낼 기념일이라 무슨 선물을 줘야 할지도 한참을 고민했다. 그한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관찰했고 너무 싸거나 비싸지도 않은 걸로 생각한 게 백팩이었다.
미리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받은 선물을 오전 운동할 때 주려고 챙겼는데, 마침 그날따라 배우 추자현을 촬영하는 날이라 최상의 컨디션으로 출근하겠다며 운동하러 오지 않았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괜찮았다. 저녁에 레스토랑에서 줘도 되니까. 난 백팩의 포장이 찢어질까 봐 품에 안고 출근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딱히 한 게 없지만 그럭저럭 흘렀다. 처음으로 같이 보낼 특별한 날이라 칼퇴하다시피 회사에서 나왔다. 부사장님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걸, 친구랑 만나기로 해서 지하철역까지만 태워주셨다. 혹시나 X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진 않을지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내가 먼저 도착해 그를 기다렸다. 쌀쌀한 날씨가 풀리는 가 싶더니 아직 추웠다. 지하철 4번 출구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데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날씨는 춥고 선물은 무겁고... 발을 동동 구르며 X가 준비한 선물이 무엇일지 기대했다.
얼마 뒤 X가 밝은 얼굴로 등장했다. 오늘 하루를 꽤 즐겁게 지냈다 보다. 난 그에게 선물을 넘기고 표정을 살폈다.
마음에 드는 거겠지? 내 선물도 챙겼겠지? 오후에 외근하고 시간이 남았을 텐데, 동료들과 같이 무엇을 골랐을까? 내심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나를 위해 준비한 밸런타인데이 선물은 없었다...
아웃백에서 식사하는 내내 그는 추자현을 만나서 얼마나 소름 돋는 얘기를 들었는지, 메이크업 원장님과 얼마나 합이 잘 맞는지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가 기분 좋은 일을 겪어서 나도 좋아해 줘야 하는데 왜 우울한 걸까? 오랜만에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데, 별로 맛나지도 않았다.
저녁 식사도 내가 카드로 긁었다. X가 아직 풀로 근무하는 직장인도 아닌 데다가, 내가 먹자고 했던 식당이라 그냥 계산도 내가 했다. 울적한 기분으로 레스토랑에서 나오는데 X가 토요일에 뭐 먹고 싶냐고 물었다. 자기가 사겠다는 것이다. (그래, 나한테서 삥 뜯을 생각은 아니었네. 선물이 뭐가 중요해...)
마을버스를 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 전에 항상 보내던 안부 문자도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특별해야 했던 밸런타인데이가 나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하루가 되어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는 우리가 연인인 것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 걸까? 기념일은 챙겨줄까? 사귀는 이유는 섹스를 위한 것뿐일까? 언어적인 도움이 되어서 관계를 이어가는 걸까? 우리가 사귀는 이유에 대해 점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평소에 급한 일이 있거나 미팅하려고 바쁘다든지 촬영 때문에 집중할 시간에 집중하는 건 좋지만, 갑작스럽게 소식이 없던 그의 행위에도 나의 속만 타들어갔었다. X랑 사귀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상한 생각만 자꾸 뇌리에 스치고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를 믿어야 하는데, 각자의 자유로운 시간을 보장해야 하는데, 자꾸 무언가 나의 가슴을 후벼 파고 찝찝한 기분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답답한 관계를 진작에 끊어버렸을 텐데, 이번에는 잘도 끌고 나갔다. X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고, 직장과 논문 때문에 나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거라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신 앞으로 우리 사이에 무형의 룰(나 혼자)을 정했다.
1. 기념일은 먼저 얘기할 때까지 기획하지 않기.
2. 데이트 비용은 최대한 더치 페이하기.
3. 자기 계발 시간은 방해받지 않기.
4. 기대하거나 의지하지 않기.
예전에 그가 진지하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从没想过为了多获得点什么才去谈这段感情(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 이 관계를 이어나가는 게 아니다.)”. 우리 관계에 있어 비즈니스적인 결과물을 기대한 게 아니라, 그냥 감정적으로 나를 좋아하서 연애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X에 대해 많은 걸 요구하게 되었고 기대하게 되었다.
우리 관계에 대해 이성적인 X인 만큼, 나 또한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이 관계를 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나한테 집중하고 굳이 모든 것에 더블비용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그의 인생이 있고 내겐 나의 삶이 있는 거니까.
에필로그:
하나씩 따지고 싶지 않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X를 위해 선물했던 게 꽤 많았다.
고슴도치 키링, 쿼카 인형, 백팩, 슬링백, 책, 지압 마사지기, 헬스장갑, T셔츠(서너 벌), 반바지(서너 벌), 바닥 매트, 콘서트 티켓(샘 스미스 내한), 비치타월...
반면에, X가 선물이라고 줬던 게 현저히 적었다.
향수, 바디워시 세트(헬스장에서 같이 사용함), 도자기 소품(거절함, 미니 치약만 한 사이즈에 내 취향이 아니었음)... [사귀는 동안 선물로 사줬던 게 이게 끝인 듯...]
연애를 시작하면 항상 나도 모르게 과소비 모드에 빠지게 되고 남자 친구를 위해 투자하는 거 같다. 이런 걸 부모님이 아시면 뭐라고 할지 훤히 보인다.
부지런히 일하면서 돈을 벌어도 남는 게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