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에는 내가 만들어낸 개념과 기준이 가득 차있어서 자칫하면 생각이 좁은 창고 안에 틀어박힌다는 걸 서서히 알게 되었다. 시야를 좁히는 대표적인 개념 3가지는 완벽함, 규칙, 잘함이다.
다년간의 실패와 훈련으로 ‘완벽’이라는 기준 자체가 허상이며, 사는데 ‘규칙’은 없으니까 자유롭게 살면 된다는 걸 얼추 이해했는데, 잘하는 건 자꾸 속는다. 자꾸 뭘 잘하고 싶다. 일도 잘하고 싶고 글도 잘 쓰고 싶고 생각도 잘하고 싶고 인생도 잘 살고 싶다. 그러다 아이유 님이 ‘잘한다’에 대해 말하는 영상을 봤다. 대화를 그대로 옮겨 적는다.
Q: 잘하려면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겠죠?
A: 근데 잘한다는 기준이 너무 애매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까
네가 네 것을 찾고,
너만의 것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돼
내가 좋은 글과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냥 그거 좋다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러면 나는 그게 잘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잘한다의 기준이 애매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맞아, 잘하는 게 뭔데? 질문하게 되었다. 잘하는 게 뭔데? 완벽한 게 뭔데? 규칙은 누가 정한 건데? 나의 경우에 그걸 정한 건 대부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나다. ‘완벽함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건 아니야.’ 내 안의 검열관이 딱딱한 안경을 올려 쓰며 말한다.
하루키의 에세이에는 검열관 역할을 담당하는 벌 두 마리가 등장한다. 조르지오와 카를로라고 이름 붙인 벌들은 쉴 새 없이 붕붕 거리며 하루키의 머릿속을 날아다닌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흔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나이만 먹어갈 거야. 소설 같은 걸 써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붕붕붕붕.” 벌들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어디까지나 하루키를 쫓아온다. 하루키는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 목소리에 대항하는 대신 작가로서 자기만의 기준, 자기만의 자세를 정한다.
‘자기 눈으로 본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처럼 쓴다,
이것이 기본적인 자세이다.
자신이 느낀 것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안이한 감동이나 일반화된 논점에서 벗어나,
되도록 간단하고 사실적으로 쓸 것.
다양하게 변해 가는 정경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계속 상대화할 것.’
벌과 검열관이 난무하는 머리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맞다고 생각했던 기준을 파괴하고 다시 세운 기준을 파괴한다. 기준을 파괴하는 것이 기준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완벽한 건 없다, 잘하는 공식도 없다, 규칙 같은 건 없다, 그냥 좋아하는 걸 하자. 벌들은 날아다니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잘하는 나 대신 자연스러운 나로 있기.
• 출처: 딩고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