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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지런한백수 Feb 10. 2022

[4 DAY] 그들의 불안에 대하여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


86세의 할머니가 아직도 정정하게 일을 하신다.

추석-설날까지 1년 중 3-4달 남짓을 연달아 쉬시는 대신 남은 8-9개월을 계속해서 일하신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억세진 목소리와 행동은 가끔 옛날 조강지처 클럽에 나왔던 김혜선 배우가 역할을 맡았던 '한복수'를 떠올리게끔 한다.


애초에 그런 성격이었던 것이 아니라 생활과 환경에 따라, 먹고살아야 했기에 목소리가 커지고 억세질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러기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제 자식들에게 여과 없이 흘러가도 삼촌과 엄마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유다. 할머니가 그러는 건 모두 저들을 먹이기 위했던 결과이니까.


오히려 할머니가 초반 3일간 '좋음 상태'일 때 나긋나긋하고 역정을 내지 않을 때 걱정한다. 늙으셨구나. 실제로 엄마가 3일간 마음 아파하더니 3일째 오후부터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내는 소리에도 안심을 했다. 그걸 보고 있는 나는 생각한다. 엄마나 할머니나 이상해.




할머니의 불안


할머니에게 가끔 전화가 반복해서 올 때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숨이 막히곤 했다.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면 전화를 한 번에 받지 못하곤 하는데 그러면 받을 때까지 전화하곤 하셨다. 막상 받아 보면 별 일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받지 않았다고 큰 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왜 전화를 안 받고 그래!! 무슨 일 있었나 걱정했잖아! 아이고, 엄마도 안 받고 너도 안 받고!"


대체로 엄마가 안 받고 내게 넘어올 때 역정도 함께 넘어오곤 했는데 나는 늘 '엄마가 안 받고 너도 안 받고'에서 걱정을 하는 포인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도 안 받고 나도 안 받으면, 얘네가 뭘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게 내겐 일반적이어서 위와 같은 상황일 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에 받을 때까지 전화하는 할머니는 늘 일반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성격을 불안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할머닌 불안한 거다.


내 행동의 이유를 찾듯 할머니의 서사에서 그 이유를 찾진 못하겠지만 할머닌 불안감이 높은 거다.


그렇게 이해를 하려 했고 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가 받지 않으면 나도 굳이 받지 않았다. 엄마가 받지 않는 경우는 드물게 이런 시국에 할머니가 걱정하는 외출을 했거나 잠을 잘 때였다. 전자일 땐 내가 받으면 내게 이런 때 나가면 어쩌냐는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기에 받지 않았고 후자엔 집을 조용하게 하기 위해 받거나 나도 무음으로 해둘 때였다. 


 차라리 그럴 때면 내가 상황을 아니 골라 받을 수 있었는데 코로나 전까지 엄마가 일을 할 땐 이해의 정도를 벗어났다. 어린 시절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게 전화를 걸어 걱정을 호소하는 거다. 걸려온 전화를 받고 먹지 않아야 할 욕을 얼마나 먹었는지 그 스트레스 정도를 수치로 치환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삼촌과 엄마는 말한다.

그건 욕이 아니라고.


다만, 그 소리가 아무리 걱정이 담긴 소리여도 듣기에 역정과 다를 게 없기에.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신경이 곤두서는 것엔 달라질 게 없기에. '할머니'의 전화는 무조건 받아야 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현재는 아주 드물게 받고 있다.




엄마의 불안


할머니의 불안과 엄마의 불안은 좀 다르다.


엄마는 전과 '다름'에 유독 민감했다.


그리고 정상적인 '변화'와 '성장'에 반응했다.


어린 동생이 배에 있었을 때부터 동생이 9살인 지금까지 엄마가 내게 나눈 고민을 듣고 있다 보면 차라리 망상이 낫다 싶을 때가 있다. 음, 염려증이 심하다. 나중에 얻은 자식 이어서인 줄 알았더니 나 때도 그러했단다. 그래서 나 때는 오히려 날 보지 않았다고. 아, 방목했다는 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자랐다. 내 사전에 엄마와 아빠가 고민 대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냥 내가 알아서 선택하고 결과나 과정을 말해주면 됐다. 그것이 그저 엄마의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 불안함과 걱정에서 벗어나고자 한 도피였다니. 자식을 대상으로 보통 그러나?


그러나 동생을 대하는 엄마를 볼 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곤 하다.


늦둥이로 태어나 온갖 사랑과 애정, 오냐오냐, 뭐든 OKAY를 받아온 동생은 선천적인 예민함과 후천적인 오냐오냐의 콜라보로 소리를 악 질러도 떼를 써도 엄마가 '진심으로' 화낸다, 라는 가정이 없다.


엄마가 인상 한 번 찌푸리면 마음의 거리를 두던 나와 다르다.


그런 동생이 7살 때 즈음 어느 날, 소리를 지르지 않고 엄마의 말을 비교적 잘 듣는 거다.


그 '잘 듣는다'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양치하라 하면 양치하고, 혼자 조용히 놀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 정도였다. 집이 전보다 조용해지긴 했지만-확실히 며칠 전과 차이가 있었다는 소리다.- 이 변화가 나쁜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엄마였다.


불안해했다. 나를 조용히 불러 한 말은 가관이었다.


"연우(*가명)가 말을 너무 잘 들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말을 잘 들어? 그게 왜? 그러나 엄마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고 상심에 빠져 있었다. 그 순간, 가장 큰 걱정인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 그에 맞춰 들어보자. 싶어 듣자 하니. 위에서 말한 것처럼 평소와 다르게 조용하고 혼자 잘 놀았다는 점이었다.


그를 아이의 '성장'이라 생각한 나와 '꾸밈'이라 생각했던 엄마의 차이였다.


하도 주변에서 떼를 쓰거나 소리 지르는 것(우는 것)에 대해 뭐라 하고 그 당시 크게 혼난 적이 있어서 애가 그런 행동들을 하지 않았다, 는 게 엄마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게 진짜 이유인지, 아이가 7살 즈음에 성장하여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엄마는 그를 자연스럽게 풀기보다 동생에게 직접적으로 그냥 평소처럼 하라고, 엄만 그게 좋다며 질색을 했다.


그때 느꼈다. 엄마는 성숙한 사람이 아니구나.


내가 어릴 땐, 엄마도 어렸고 사느라 바빠 삶과 행복, 여유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엄마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고, 나를 멀리 할 때 나도 함께 멀어졌다. 하지만 여유를 찾은 엄마는 동생에게 전이 더 좋다며 차라리 울고 떼쓰고 소리 지르라며 애원 아닌 애원을 하고 있었다. 아직 그것이 옳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가 아이다워야 한다는 점에선 동의하나 그러라고 부추기는 것이 오히려 성장을 저지하는 것은 아닐까.


엄마와 동생과 있다 보면 함께 육아의 현장에서 참여하고 엄마가 고민하듯 함께 고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엄마의 불안은 늘 비슷했다.


할머니가 본 성격처럼 악을 쓰지 않는다고 불안과 걱정에 빠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마는.




4일째,

할머니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어떻게 버렸는지부터 씻을 때 물이 튀겼다, 밥을 먹을 때 의자를 어떻게 앉았다까지 하나하나 행동거지를 눈에 보이는 대로 뭐라 하는 것을 보면 귀에서 피가 철철 흐를 것 같다.


엄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런 말을 하는 할머니를 보고 고개를 젓고 엄마를 보면 엄마도 당연히 그 말들이 좋은 말들은 아니기에 표정이 구겨진다. 하지만 세월의 적응도라는 게 있어 시간이 지난 후 내가 태연해지듯 엄마는 더 초월한 표정이었다. 원래대로인 할머니에 감사하고 있었을까?


할머니와 엄마의 불안에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들이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내가 가진 불안은 무엇일까?


그들이 가진 불안과는 다른 영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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