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이 어느 순간 시작된 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분명 전조 증상이 있었다. 잠에 드는 시간이 점점 늦춰진 것이다. 침대에 누워 3시간을 뒤척이다 잠이 들던 게 어느 날 5시간으로 늘어나 있고 8시간으로 늘어나 있고. 나는 최대 18시간까지 못 자봤다.
잠자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2년이란 시간을 병원에 가지 않고 꿋꿋이 버텼다. 그 이유는 '정신건강의학과'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묘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픈 사람은 어쨌든 병원에 가게 된다. 어김없이 제대로 못 잔 날. 대충 눈만 붙이고 깨어났을 때 '안 가고는 못 살겠다' 싶은 생각이 문득 있었다. 2년이란 시간을 미룬 게 무색하게 나는 벌벌 떨며 휴대폰으로 집 근처 정신건강의학과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틀비틀 걸어 무작정 병원에 갔다. 대기하는 환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 계신 간호사 분이 말하길 이미 당일 다 찼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병원은 전문의가 한 명밖에 없고 다들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춰오기 때문에 한적해 보일 뿐이었다. 새삼 느꼈다. 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나는 병원의 간호사 분께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 언제든 좋으니 제발 가장 빠른 시간을 잡아달라고. 일주일 뒤로 예약을 잡고 돌아오면서 일주일은 또 어떻게 버텨야 하나 걱정했다. 걱정이 무색했으면 참 좋으련만, 내 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어김없이 푸석한 몰골로 예약일에 병원을 찾았다.
그게 2023년 3월 14일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다닌 병원을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잠을 더 심각하게 못 잘 때는 곧바로 병원에 예약 변경 전화를 넣었다. 증상을 설명하고 추가로 약을 타면 나는 어떻게든 잘 수 있었다.
그래서 모르고 있었다. 내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하필 그걸 파리로 비행기에서 알게 될 줄이야. 비행기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없다. 그렇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다. 비행기를 그만 타고 싶다고 징징거릴 수도 없다.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없는 곳에서야 내가 얼마나 아픈 사람인지 알았다.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얼마 있지 않아 내 예약일이 다가왔고 그날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곧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당연히 약을 가지고 갈 생각이라고. 증명서나 처방전을 필요 없냐고. 그때, 전문의가 말하길 거의 문제 되는 일은 없지만 불안하면 영문 증명서를 발급해 주겠다고 했다. 처음으로 혼자 가는 여행이다. 모든 게 걱정스러웠던 나는 어떠한 변수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4만 원을 내고 영문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발급받은 영문 증명서(Medical Certificate)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Diagnosis. Unspecified mood[affective] disorder : 진단명. 불특정 기분[정서] 장애
-The patient had shown anxiety and insomnia for long time : 이 환자는 오랫동안 불안과 불면 증세를 보여 왔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한 검사 결과에 따르면 내 불면의 이유는 불안이다. 결과에 따르면 나의 불안은 고등학교 3학년이 겪는 불안보다 훨씬 높다.
그 사실을 나는 비행기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동안은 약으로 잘 다스려 왔기에 몰랐던 내 병증의 원인. 불안.
도대체 나는 왜 불안하지?
어떤 종류의 불안이지?
뭐가 날 불안하게 만들지?
의미는 똑같지만, 쓸데없이 변주만 준 다양한 문장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들을 너무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나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불안과 불면. 한 끗 차이의 단어와 매일을 공생하면서? 그들을 잊기 위해 약으로 나를 다스려 가면서?
비로소 나는 겁에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