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서 우리가 한 것들

삿포로 스키장 니세코에서 벌어진 일들.

by 양양이

스노보드를 처음 타고 라이딩을 이제 조금 익숙하게 하던 그때. 일본에 가서 보드를 타볼 기회가 생겼었다. 나는 초급자였고, 초급 슬로프만 겨우 타던 실력이었는데 스노보드 1세대 프로들과 삿포로 원정길을 함께 가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원정대를 꾸렸고 인원수에 맞춰 모든 것을 예약했지만, 누군가 갈 수 없게 되자 남은 원정 비용을 메꾸려 급하게 누군가 영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스노보드 대회 심사위원들 급이었다. 그 일행 중 한 명은 내 친구였는데, 내가 너무 일본 스키장에 가보고 싶다고 하니 그냥 깍두기 셈 치고 데려갔던 것이었다. 그들과 나의 실력 차이는 엄청났고, 사실 같은 슬로프에서 비슷한 속도로 라이딩을 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흔쾌히 데려가 주었다. 참 운이 좋았다.


삿포로 니세코 스키장에 도착한 첫날은 날씨가 좋았다. 눈이 엄청 많이 내리는 삿포로에서 그날만큼은 눈도 내리지 않았다. 날씨가 쾌청하니 사진 찍기 딱 좋았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나라 스키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사이즈의 스키장이어서, 그 코스를 원정 내내 다 돌아볼 수도 없었다. 적당히 사진 찍기 좋은 슬로프들을 몇몇 골라 관광 보딩을 - 슬슬 관광을 즐기며 타는 보드를 관광 보딩이라고 한다 - 했다. 실로 절경이었다. 정상 꼭대기가 아니었는데도 어디를 봐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스키장 맞은편에는 후지산처럼 보이는 요테이산이 있었다. 정상은 만년설처럼 보이는 눈이 덮여 있었고, 일본의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이래서 해외 나가서 스노보드를 타는 건가 싶었다. 설질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자연설이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것은 다음날이었다. 날씨가 조금 흐린 듯했으나, 리프트 운영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고,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정상은 날씨 악화로 폐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턱이라고 해도 거의 정상이나 다름없는 높이이긴 했다. 그리고 우리는 리프트에 내리자 뭔가 잘못됨을 감지했다. 사방이 자욱한 안개로 인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시야라곤 고작 한 2~3m 정도가 다였다. 바로 앞에 있는 일행 한 명 정도 겨우 보이는 시야였다. 나는 이 거대하고 무서운 자연에 그대로 삼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스키장에 다니면 종종 빠르게 변하는 기상악화로 인해 이런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국내 스키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곳은 외국이고, 엄청나게 높고 큰 산이며, 더군다나 나는 초보자였다. 이들과 슬로프를 내려오는 속도와 감각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스키장의 슬로프가 익숙지 않았고,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스키장에는 슬로프마다 펜스가 쳐져 있어서 어디가 슬로프인지 알 수 있게 구별해 두었지만, 해외 스키장은 그렇지 않았다. 펜스는 없었고 잘못 내려가면 그냥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었다. 그 낭떨어지 밑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차갑고 깊은 계곡물이 있을지도, 끝도 없는 말 그대로의 낭떨어지 일지도. 바로 야생 그 자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내가 이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 내려갈 수 있을까 공포가 엄습했다.


다행히 일행 중 한 명은 이 스키장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선두로 우리 일행은 조금씩 천천히 슬로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선두를 믿고 오로지 앞사람의 발만 보면서 천천히 내려가는 것 뿐이었다. 그 선두에 선 친구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자칫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이 공포심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감각에 의해서 한턴 한턴 내려오는 게 다였을 것이다. 뒤로는 줄줄이 일행들을 이끌어야 했다. 앞길에 어느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슬로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낮은 슬로프 바로 옆에 최상급 슬로프가 붙어 있었다. 자칫 길을 잃어서 최상급 슬로프로 들어가게 되면, 내가 과연 내려갈 수 있을까도 싶었다. 여러 가지 최악의 상황은 많았지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같이 함께 하는 일행들을 믿고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나에게 이건 목숨을 건 라이딩이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될 만큼 긴장이 되었다. 겨우겨우 천천히 아무 사고도 없이 무사히 잘 내려올 수 있었다. 슬로프가 너무 길어서 다 끝까지 내려가는데만 해도 몇 시간이 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걸렸다. 그리고 내가 초보자였기 때문에 그들도 내 보폭에 맞춰서 느리게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내가 살면서 느낀 여러 공포들 중에 얼마 안 되는 극강의 공포였다.


팀으로 운동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일들을 겪는다. 누군가 선두에 서서 팀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도 선두는 길을 잃지 않고, 팀원과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온 감각을 동원해 집중해서 상황을 타파할 것이다. 누가 그런 막심한 책임감을 지고 선두에 서려고 할까. 그 선두에 선 사람도 결코 쉽게 선택한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팀원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은 오로지 이 사람을 믿고 따라줘야 한다는 것이다. 의심은 때론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서로가 한 마음이 되지 않았다면 누군가 조난당하는 일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스쿠버 다이빙을 할 때도 그랬다. 항상 두 명씩 팀을 이뤄 물속으로 들어간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공기통에 문제가 생기거나, 다른 어떤 문제들이 생길 경우 다른 한 사람이 그 사람을 구해야 한다. 팀을 이뤄서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면 깊은 바닷속에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목숨 줄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들이다. 분명 팀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살아가고 있다. 만약 같은 팀을 하기로 했다면 무조건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믿어 줘야 할 때가 생긴다. 위기의 순간들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 같은 목표를 가지고 달려 나가야 한다면 우리는 선두에 선 사람을 믿고 따라가야 한다. 가끔은 선두가 틀린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뒤에 따르는 이가 의심을 가득 품고 같이 가려고 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같이 한배에 탔다면 일단 서로를 굳게 믿어야 한다.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배가 가라앉아 버릴 수도 있다.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단은 의기투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로 뭉쳐지지 않을 때 위기는 더욱 커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된다. 일을 할 때도, 운동을 할 때도,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위기에 봉착했을 때 가장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를 굳게 믿어주는 것일 테니까. 최고의 팀에서 팀워크는 서로가 서로를 굳게 믿었을 때 발휘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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