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명의 여자 사람과 살을 맞대고 산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 VS. 나와 같은 이불을 덮는 아내.
어머니는 삼십 년 넘게 나와 한 집, 한 밥상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했다. 아내는 어머니가 예순을 앞둔 무렵 깜빡이를 켜고 느닷없이 당신 앞에 끼어들었다. 빵빵거릴 만도 한데 조수석에 앉은 나를 보고 따지지 못하였다. 어머니와 아내는 내가 언제든지 쓰담거릴 수 있다. 쭈글쭈글 홀쭉해진 양 볼을 늘이거나 어루만지기도, 부엌에 서있는 뒤태가 예뻐서 살며시 다가가 목덜미를 움켜잡기도 한다.
딸은 빼겠다. 요즘 나와 관계가 썩 좋지 않다. 아내에게 어처구니없이 투정을 부려 나에게혼쭐이 난후 한동안 냉전이었다. 딸이 슬그머니 말을 걸어와 다행이다 싶었는데, 또다시 똑같은 일이 벌어져 제2차 냉전 중이다. 1~2년 사이 성징이 오고 사춘기가 심해지면 나를 밥 먹여주고 재워주는 제일 친한 '아저씨' 정도로 여길까 두렵다. 성인 숙녀가 되면 내게 라면이나 끓여 줄려나.
"너를 딸처럼 대하마", "딸 같은 며느리" 따위의 미사여구는 믿지 않는다. 딸은 딸이고 메누리는 메누리이다. 뭐 우리나라뿐일까? 며느리가 시어머니 머리 위에 있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고부(姑婦)는 갈등을 피하기 어려운 관계이다. '고'자의 姑를 보면 왼쪽은 여자 여(女), 오른쪽은 오래된 고(古)이다. 오래된 옛 여자! 찐 고구마 두세 개를 욱여넣은 듯한 답답함. 메마르고 앙칼진 늙은 여인도 떠오른다.
아들과 손주를 끔찍이 신경 쓰는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모르랴. 문제는 아내도 남편과 자식을 걱정한다. 알게 모르게 묘한 긴장감과 함께 힘의 충돌이 생긴다.
시댁은 멀수록 좋다고 했지만 나와 아내는 지금껏 어머니 주위를 맴돌고 있다. 내의 해외 근무 동안 경력이 단절 돼버린 아내는 어머니가 해온 사업체의 직원으로 7년 넘게 어머니와 매일 얼굴을 마주했다. 사업은 사업이고 가족은 가족이어야 했지만 희미한 경계선에서 아내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해왔다. 다행히 사업장과 집이 턱밑 거리여서, 아내는 아이들을 유아기 무렵까지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대가도 컸다. 아내는 어머니의 사업장으로 출근하였고 그녀의 지시를 받으며 일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줄곧 어머니 아래에 아내가, 아내 아래에 아이들이 있는 기묘한 동거가 5년 가까이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사업 관련 송사에 휘말렸다. 민형사 피고인이 되어 수년간 노심초사했는지 큰 병에 걸렸다. 수술과 치료를 위해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아내는 엉겁결에 사업을 물려받았다. 걱정도 잠시, 사업을 접기까지 4년 넘게 아내는 사장 노릇을 톡톡히 하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섭은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쉬면 될 걸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수시로 前 대표 자격으로 사업장에 들락날락했다. 사업 관련 일에 이러쿵저러쿵 해대면 아내는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제 실제 주인은 나야 나"라고도 못하는 벙어리 냉가슴의 아내였다. 평소에는 토끼 같다가도 불같은 어머니의 운영 방식을 잘 아는 직원들은 겉으로는 어머니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면전에서 뿐이었다. 어머니가 떠나면 다시 고요함이 잦아들었다. 불만이 있어도 목소리를 내지 않다가 쌓이고 쌓여 따다다 쏘아대는 어머니와 달리,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대화로 풀며 치고 나가는 아내의 방식에 직원들은 손을 들어주었다.동굴 속에 늑대만 바글거렸어도 호랑이 없는 사업장은 무난히 돌아갔다.
사업 방식이 나름 CSI 과학수사대였던 아내와 달리 어머니는 수사반장, 투캅스 시절의 맨발 경찰과 다름없었다. 과학과 이성보다는 감성과 인정이 앞섰다. 사람은 믿어야 되고 내가 해준만큼 돌아온다는 생각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사람이었다. 사업이 사람을 직접 대면하는 일이다 보니 그럴 만도 했겠지만 그건 이미 철 지난 방식이었다. 사업 말기 송사에 휘말린 것도 사람을 너무 믿은 채 뭐 그렇게 되겠지 같은 애매한 태도가 불씨였다.
어머니에게 붙잡혀(?) 텃밭 일을 돕는 아내. 물론 나도 그렇다.
아내는 이렇게 어머니와 십 년 가까이 '불편한 동거'를 해왔다. 하지만 일하느라 축난 놈을 이끌고 집으로 출근한다고 했던가. 가정에서도 어머니와 아내의 2라운드는 계속되고 있다.
사업을 접고 이사까지 하였지만 병 치료가 끝나지 않은 어머니를 혼자 두기 어려웠다. 고민 끝에 이사 온 집 근처에 어머니를 위해 조그만 집을 하나 마련해 드렸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 지금까지 평일과 주말에 저녁을 함께 먹는다. 본래는 아내가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 저녁을 드시고 돌아가는 거였지만 뜻대로 안 되었다.
내가 아침은 챙겨 먹고 출근하는지, 손자 손녀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간식은 제대로 먹는지, 찬거리는 넉넉한지.... 우리들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 끝이 없다. 물론 이런 근심에 며느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며느리는 손주와 아들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는 여자일까.
사업을 접고 아내가 쉰 지 일 년 남짓, 아침에 삐삐삐삑, 오후에 삐삐삐삑. 때를 거르지 않고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아내는 소파에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친정 엄마라면 들어오든 말든 누운 채 뒹굴뒹굴해도 뭐랄 게 없지만 시어머니는 다른가 보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외부 베란다에 잔뜩 심어놓은 상추와 부추에 물을 제때 주었냐느니, 관음죽을 고양이가 물어뜯는지 잘 봐야 한다느니, 냉장고가 왜 이리 지저분하냐느니.... 머리가 띵하다며 아내는 나에게 하소연한다. 사업으로 수년간을 어머니와 동고동락했음에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명절이면 손수 LA갈비를 재고 송편이나 떡국을 빗고 잡채를 만드는 게 루틴인 어머니는 아내가 못 미덥다. 마트에서 양념을 사고 빗어놓은 떡을 냄비에 넣고 끓이면 된다는 아내이다. 아직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아내는 어머니의 요구를 이기지 못한다. 아내도 이젠 그러려니 한다. "어머니의 요구는 좋아요. 하지만 내가 되는 데까지만 할게요. 시원치 않으면 어머니가 하세요"라는 입장이다. 다행히 어머니가 앞장서 음식을 만들어 충돌은 없지만 따라가는 아내가 가엽기도 하다. 요즘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두 여자가 부엌에 같이 서 있는 때가 많다. 부엌의 주도권도 뺏기려나. 물론 어머니도 이런 아내의 고충을 알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선은 넘어서지 않는다.
어머니는 손주보다 내가 먼저인 듯싶다. 씻은 과일을 밀폐용기 안에 넣어 냉장고 깊숙이 숨겨 놓았다가 책방으로 조용히 가지고 들어온다. 냉장고를 텅장고로 만드는 손녀 때문에 어쩌지 못한다면서, 자식새끼 줘봐야 감사함도 모른다고 내 앞에서 손주들을 꾸짖는다. 그러면서 너라도 제대로 챙겨 먹으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지금껏 한 번도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큰 소리로 싸운 적은 없다. 아내가 어머니의 답답함을 간혹 내게 털어놓기는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뒤끝 없는 나의 아내, 자잘한 건 마음에 두지 않는 ESTP 여자이다. 노년이 되어갈수록 자신의 생각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스스로의 방식대로 상대방을 규정짓고 가두려는 성향이 강하다. 어머니도 다르진 않다. 나와 아내 모두 웬만하면 그러려니 받아주기로 했다.
핏줄을 나눈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이십여 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나는 고아가 된다. 나와 아내가 백년해로한다면 사십 년쯤은 함께 하겠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거리낌 없는 관계가 부부이다. 이리 보면 나는 행복한 남자가 아닐까. 어머니의 사랑만 받다가 아내의 사랑도 동시에 받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을 그만큼 돌려주는지 모르겠다. 철부지 때부터 서른 넘어서까지 이렇다 할 효도도 못한 것 같은데, 가뜩이나 당신에게 줄 나의 사랑을 아내가 빼앗아갔으니. 그래도 꿋꿋하게 나를 감싸고 손주를 챙긴다. 아내의 눈치에도 아랑곳없이.
아내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아내. 나에 대한 두 여인의 사랑에는 위아래가 없다. 두 여인에 대한 나의 편애가 문제일 뿐. 서운하고 꽁하면 어머니에게 붙었다아내에게 붙었다 하는 줏대 없는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