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김장을 마쳤다. 텃밭에서 직접 기른 가을배추를 어머니는 손수 뽑았고 나는 싣고 왔다. 배추를 반으로 잘라 씻어 소금에 절이고 양파, 고추, 무를 잘라 채치고 갈고... 뽑아온 배추가 작년보다 절반 넘게 줄었는데도 품은 똑같이 든다. 주말 내내 어머니의 지휘에 따라 아내와 나는 겨울 차비를 마쳤다. 일이 고된 지 몇 차례나 구시렁거리더니 굽혔던 허리를 펴며 한마디 한다.
"아들, 내년부터는 텃밭 안 해얄까봐"
"그래요? 잘하셨소, 딴 말하지 않기예요"
속이 시원했다. 어머니가 텃밭을 그만하길 줄곧 바라왔다.
2016년부터였으니 8년째 도시 농부로 살아왔다. 나 말고 어머니가. 나는 무대 뒤에 숨은 간헐적 일꾼일 뿐 판을 짜고 움직인 건 어머니였다. 나는 지난 5월 잡초 뽑을 때 얼굴을 한번 내민 후 9월 하순 고춧대 뽑고 배추 심을 때 텃밭에 갔다. 한 여름에 지리멸렬 비가 내린 덕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물 주는 일은 면했다. 나머진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도시에서 자랐던 나와 달리, 어머니는 시골 처자였다. 도회지로 시집갈 때까지 산과 들을 다니며 몸소 익힌 지식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무나 들꽃, 들풀의 이름과 식생을 줄줄이 대는 낭만 소녀이다.
도시 농부 초기 한두 해까진 나도 열정이 가득했었다. 어머니를 차에 싣고 텃밭에 가서 물과 비료를 주고, 농작물도 같이 거두었다. 화학 비료를 쓰지 않아 수확이 시원찮은 때가 흔했고 고추 농사가 폭삭 망해버린 해도 있었지만, 상추부터 배추까지 밥상에 올라오는 싱싱한 푸성귀를 먹는 즐거움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더욱이 2019년 어머니가 중병에 걸쳐 수술을 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깨끗한 농산물은 더 간절했다.
일찍이 올 초부터 텃밭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못해도 아쉬운 점이 없었다. 작년 이사 온 집베란다가 커서 여기에 상추, 고추, 부추, 케일만 심어도 한 식구가 반년 먹기에는 모자라지 않았다. 굳이 먼 거리를 오가며 텃밭을 일구지 않아도 먹기에 족했다. 베란다에서 오렌지, 사과, 바나나 껍질 등을 발효시킨 물을 뿌려주면 알아서 잘 자라고, 그런 작물을 쓱 뜯어서 물에 한 번 씻어 바로 밥상에 올리면 끝이다.
그런데도 추위가 여전했던 올 3월 초순까지 어머니는 혼자서 여기저기 텃밭을 할만한 곳을 알아봤다. 이사도 왔으니 제발 그만하자는 나의 다그침에도 아랑곳없었다. 결국 걸어서 십오 분이 못 되는 되는 밭에 두 이랑을 얻었다. 힘들다면서도 군소리가 없다. 당신 몸보다 자식들 건강이 먼저라면서. 아내는 손에 물은 묻히면서도, 옷과 신발에 흙먼지가 붙는 건 죽기보다 싫어한다. 내가 텃밭으로 소환(?)될 때 울며 겨자 먹기로 아내도 따라나설 뿐이다.
올해도 나는 밥벌이를 핑계로 코빼기도 안 비췄다. 주말에라도 도와줄 법한데 이런저런 이유로 또 딴청을 부렸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올해 들어 더욱 손 하나 까닥 안 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입만 호강한 셈이다. 몸이 예전만 못하면서도 자식, 손주, 며느리 좋은 음식 먹여야 한다면서 지금껏 열심히 텃밭 일을 해왔다.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딨냐고. 농약 한번 안 뿌린 나물을 공짜로 먹는 재미가 어디냐며 당신은 행복하단다.
그러던 어머니가 당신 입으로 텃밭일은그만해야겠단다. 힘이 달리고 어지럼증이 심해졌다면서. 한치 망설임 없이 "잘하셨소, 그만하세요"라고 툭 던졌지만 미안한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만 나이로 일흔이 훌쩍 넘은 어머니다. 독한 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렸음에도 꿋꿋이 이겨냈고 안정기가 아닌데도 우리 집 베란다와 텃밭을 오가며 왕성하게 생산활동을 해왔다. 더 이상 뜯어먹을 게 아니라, 내가 생선을 발라주며 수발을 거들고 걱정과 근심보다 기쁨과 행복을 안겨줘야 하는 어머니였다
그럼에도 냉장고 깊숙이 숨겨놓은 과일을 나에게만 들이셨다. 아내가 일이 생겨 애들 간식과 저녁 준비를 못하면 소리 없이 우리 집에 와서 떡볶이와 김칫국을 만들고, 밥을 해서 앉혀 놓았다. 집에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도록물건을 싸게 파는 전통시장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현금 박치기로 과일을 사서 이고 지고 왔다. 편하게 뜯어먹고, 받아먹고 얻어먹었다. 우리가 제 때에 끼니를 때운 것도, 손주가 열이 오를 때 병원에 데려가준 것도 어머니였다.
당연하다고 여긴 게 당연한 게 아니었다. 현기증이 심해지고 들숨 날숨이 약해지는 노구의 여인이 힘써온 덕분였다. 세상 재밌고 즐겁게 해온 텃밭을 내년부터는 안 해얄까봐라는 어머니의 말. 나는 지금껏 뭘 해왔는가? 내가 어머니를 도운 일은 도대체 뭐였는가? 텃밭을 그만하겠단 그 말씀을 거두라고 말할 용기도 쇠약해진 어머니를 쌩쌩히 돌려놓을 힘도 없다.
그런 어머니가 따로 나를 부른다. 내 명의로 천만 원 정기 적금을 부었다면서, 비밀번호는 죽기 전까지 알려주지 않겠다고 그런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옛날부터 조금씩 모아둔 현금을 당신의 침대 매트리스 속에 숨겨 놓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이미 천만 원이 되었단다. 물가가 계속 오르니 현금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바보임을 알았으면서도 수년을 허송세월했다며 아쉬워한다. 그러다 느닷없이 한마디 덧붙인다.
"아들, 천만 원은 엄마가 죽을 때 비밀번호 알려줄 테니 엄마 장례식 비용으로 써"
무슨 놈의 죽는소리냐며 장례식 비용은 또 뭐냐며 버럭 화를 냈지만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급히 고개를 숙인 채 어머니를 뒤로 하고 책방으로 들어갔다. 얼굴을 감싸 쥐고 한참을 울었다.